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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경 Dec 15. 2022

“나만 아니면 돼”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 곳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을 중심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지에 대한 고민은 철학에서 빠지지 않고 다루어지던 주제다.


그렇다면 동물을 동물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외관상으로 판별할 수 있는 겉모습의 특징들 외에, 각 종이 갖고 있는 고유한 특성은 무엇일까.


예컨대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이라면, 동물의 존엄성은 인간의 그것보다 가벼울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로 글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피터 싱어 역시 비슷한 물음을 가졌던 것 같다.


그는 책 '동물해방'에서 이익에 대한 동등한 고려라는 기본적인 도덕 원리를

아무런 이유 없이 우리 종의 구성원에게만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누군가는 이 글을 읽고 '동물 되게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인가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싱어는 이를 사전에 반박한다. 소수 인종의 평등에 관심을 가지려면 그들을 애호하여 예쁜 존재로 생각해야하지 않듯, 동물들이 처해있는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동물 애호가'로 생각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동물권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수없이 많지만, 그 중 싱어는 동물들, 즉 착취당하고 있는 집단이 자체적으로 그들이 받는 처우에 대항하여 조직적으로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꼽는다. 또한, 억압을 가하는 집단(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억압에 개입되어 혜택을 누리기 때문에, 이 상황을 객관적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싱어가 타파하고자 하는 것은 종차별주의(speciesisim)이다. 이는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종의 이익을 옹호하면서 다른 종의 이익을 배척하는 편견 또는 왜곡된 태도를 일컫는다.


제러미 벤담의 의견을 가져오자면, 그는 문제의 핵심이 동물에게 이성적으로 사고할 능력이 있는지 혹은 대화를 나눌 능력이 있는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그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이다. 즉,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의 유무'로 어떤 존재가 평등한 배려를 받을 권리가 있는지를 가늠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통 또는 행복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이 이익(Interests)을 갖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평등의 원리는 그 존재가 어떤 특성을 갖건, 그 존재의 고통을(대략적으로라도 비교할 수 있다면) 다른 존재의 고통과 동등하게 취급할 것을 요구한다. 이를 조금 어려운 말로 하자면, 다른 존재의 이익에 관심을 가질 지의 여부를 쾌고 감수 능력(limit of sentience)에 따라 판별한다고 할 수 있겠다.


출처 구글. 색깔 있는 사진은 더 끔찍해서 흑백으로 가져옴


동물이 느끼는 고통 혹은 쾌락이 인간이 느끼는 고통, 쾌락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어떻게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누군가는 '인간의 우월한 정신 능력' 등을 이야기하겠지만, 싱어는 이에 대해 아기나 정신 지체 장애인들을 실험 대상으로 삼을 용의가 있는지를 묻는다.


그런데 싱어는 '종차별주의를 반대한다'는 주장이 '모든 생명은 동등한 가치가 있다'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의식, 미래에 대한 희망과 포부를 가질 수 있는 능력 등은 고통을 야기하는 것과 별다른 문제가 없지만, '목숨을 앗아가는 문제'를 따져볼 때는 위의 능력들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다른 종을 생각할 때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편향되게 만드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존엄성과 가치를 갖는다는 생각인 것 같다. 그렇지만 서두에서 말했듯, 본래적 존엄성 또는 본래적 가치란 무엇인가?


싱어는 "이때에야 비로소 우리 스스로가 인간을 높이면서 동시에 다른 모든 종들의 지위를 상대적으로 낮추고 있음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오직 인간만이 갖추고 있는 유일무이한 존엄성, 가치를 이야기하려면 어떤 적절한 능력이나 특징을 지적해야 하는데, 인식 능력, 자의식, 지능 등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수많은, 동물보다 낮은 사람들(회복할 수 없는 수준의 장애가 있거나 영유아)은 배제되게 된다.




그런데 효율적인 식료품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공장식 축산의 행태를 다루는 3장은 사실 그렇게 자세히 읽진 않았는데,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고 아무튼 좀 읽기가 힘겨웠다. 단순히 '사람이 살려면 그래도 먹어야지' 정도를 떠나서, 한 동물의 전 생애가 내 식탁 위에 올라오기 위한 과정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보는 것은 달랐다.


(특히 나는 라떼가 너무 좋은데...단지 젖소에게서 우유가 나오니까 나도 우유를 먹을 수 있다는 것과, 내가 우유를 먹기 위해 젖소를 계속해서 임신시키고 평생을 우유를 생산해내는 도구로 취급하는 건 너무 큰 차이가 있어서 마음이 불편했다)


고기는 참아도 라떼는 못 참는 나..


여하튼, 싱어의 논변은 비록 모든 생명은 동등한 가치가 있다고 이야기 하지는 않음으로써 다시 한번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구별, '정상성'과 생명의 경중에 대한 여러 논의를 불러일으킨다.

또, 쾌락과 고통을 계량하는 것이나 측정하는 것이 가능한 지, 그 (고통/쾌락의)정도가 개체마다 일정한 지에 대해서도 비판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렇다면 고통이 없게 한다면 도축 산업이 허용될 수 있을 지에 싱어가 어떻게 대답할 지 궁금하긴하다.



공리주의 철학자로서 논변을 전개하다보니 여러 반박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부분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대중이 중요하게 인식할만한 논점들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


결국에는 나의, 그리고 내가 속한 집단의 고통과 쾌락만을 고려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인데, 언뜻 생각하기에는 당연한 말 같아도 다른 종에게까지 그 고려의 외연을 확장하는 건 또 실천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늘 그랬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다는 것이 포기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기 때문에...다각도의 방향에서 노력해볼 문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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