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10
여기가 어디더라. 말뚝에 줄줄이 연결된 알전구를 보니 다이빙 샵 사람들끼리 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온 적이 있는 피자 가게였다. 태형, 재현과 나는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각자의 몫으로 맥주를 하나씩 시켰다. 재현은 나와 처음 만났을 때 모습 그대로였다. 껑충하게 큰 키, 조금 말쑥한 차림새, 적은 말수에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점잔을 떨었다. 태형 역시 정돈되지 않은 머리에 편한 옷차림으로 턱을 괴고 바다 쪽을 바라보며 음식을 기다렸다. 반면 스스로 느끼기에 나는 서른 살의 홍지연 그대로였다. 바닷가에 어울리지 않는 하늘색 반팔 셔츠에 슬랙스로, 출근할 때 교복처럼 입던 비즈니스 캐쥬얼 차림이었다. 왜 이렇게 입고 왔지. 나를 제외한 두 사람은 각자 핸드폰을 만지고 바다를 바라보며 시간을 때웠다. 이대로 이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건가? 가만, 태형과 재현이 어떻게 아는 사이더라? 세계관 붕괴가 오려고 하는 시점에 피자가 나왔다. 무스타파가 식기와 피자를 천천히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유창한 한국어로 말했다. 아직 뜨겁습니다. 아, 개꿈이었다.
무스타파가 운전을 하고 자파리가 조수석에 앉았다. 재희 언니, 태형과 나는 장비들과 함께 짐짝처럼 트럭 뒤편에 실려서 블루 홀로 향했다. 트럭이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가는 동안 재희 언니가 뜻밖의 말을 했다.
“태형이 너, 생각보다 매정하더라.”
속도 방지턱처럼 울퉁불퉁한 돌출물을 한 번 뛰어넘자 언니가 말을 이었다.
“서율이 걔 울고불고 난리였어. 한국 가서 또 보자는 게 그렇게 어렵니.”
모르는 사이에 서율이 자신의 마음을 우회적으로 전달한 모양이었다. 한국 가서 또 보자는 거, 여행지에서 만난 한국인들끼리 흔히 인사치레로 하는 말 아닌가. 그마저도 거절한 태형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태형은 국적불문 사람을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친한 편이었다.
“한국 가면 어떻게 될 줄 알고요.”
“얘 말하는 거 봐. 그럼 우리도 안 보게?”
태형은 곤란할 때 앞머리를 오른손으로 쓸어 넘겼다. 흐트러진 머리칼이 눈썹 사이로 흩어져서 자연스럽게 갈라졌다.
“봐야죠, 봐야죠.”
“정말 영혼이 하나도 없다, 없어.”
반전을 가하는 의외의 말들에 장단을 맞춰주는 말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실실 웃으면서 스스럼없이 대하는 태형이 이집트의 인연은 이집트에서로 남겨두려고 했었다니. 실망스러운 마음과 동시에 애초에 아까의 같잖은 고백은 너무나도 가당찮은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다시 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사람이 그런 류의 말을 듣는다면 누구라도 곤란해 했을 것이다.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될 줄 아냐는 게 무슨 말이야?”
“한국 가면 각자 상황이 다르니까. 애초에 빈 말을 하기가 싫다는 거야, 난.”
트럭에 실어둔 장비가 덜컹거리는 소음에 뒷말은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너네 다들, 연애는 하고 사니.”
기어코 가장 피하고 싶은 주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회피하고 싶었지만 옹기종기 붙어서 트럭에 실려 가는 와중에 자리를 피할 수도 없었다. 모두 대답을 뭉개자 재희 언니가 말을 이어갔다.
“태형인 엄청 오래 연애하고 헤어졌다 했었나?”
순간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 숨길 수 없이 표정에 드러났다. 저렇게 마음을 못 숨겨서야.
“네, 근데 뭐. 그나저나 지연 누나는 인기 많을 것 같은데.”
저 자식이. 완전히 멕이는 소리였다. 아까 낮의 대화에 이어지는 말에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서 하는 말인지, 거절을 에둘러서 다시 하는 것인지 구별이 가질 않았다.
“너한테서 인기 없잖아.”
아, 홍지연. 진짜 찐따같아. 다합에 온 뒤로 마음의 소리가 뇌를 거치지 않고 자꾸만 입으로 먼저 튀어나갔다. 뇌를 거쳐 입으로 가는 필터가 부서져서 목소리가 바로 허공으로 치고 나가는 게 아닐까. 뭐야, 너네 진짜 웃긴다, 하는 재희 언니를 옆에 두고 애써 못 들은 척하는 태형의 노력이 눈물 겨웠다.
블루 홀의 주변은 사막과 같이 황량한 모래밭이었다. 그 사이에 빛나는 홍해 바다는 마치 큰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들거렸다. 한 낮이라 뜨겁고 소금기 가득한 공기가 온 몸에 달라붙었다. 바닷바람에 휘날린 머리카락은 금세 퍽퍽해져서 아무리 빗질을 해도 꾸덕꾸덕했다. 요란한 스트라이프 무늬 수영복을 입은 중년의 서양 여성들은 그을린 살갗을 내놓고 잘도 돌아다녔다. 다이빙 수트 안에 래쉬가드를 입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우리는 나무와 밧줄을 이용해서 펜스를 쳐 둔 곳 옆으로 장비를 들고 걸었다. 선글라스를 낀 사람들 옆으로 모자도 없이 땡볕을 온 몸으로 맞으며 나아갔다. 한국의 해변 가에서 맡아지던 비릿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내가 태형에게 느끼는 설렘은 여행지에서 오는 아드레날린과 혼동되는 일회성의 이끌림일까? 태형을 회사 동기나 후배로 만났다면 어땠을 지를 상상해보고 싶었지만 잘 예상이 되지 않았다. 회사 앞 이천 오백원짜리 커피를 들고 사무에 찌들어서 함께 차장님 욕을 하는 태형.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을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갈수록 귀에 가해지는 압력만큼 강하게 작용하는 이 이끌림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태형은 예뻤다. 영화에 나오는 배우처럼 멋진 타입은 아니었지만,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연하라서 그런가, 어떨 땐 볼을 한 번 만져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재현을 생각하면 반대였다. 재현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어 줬으면 싶었다. 내 볼을 만져주고, 예쁘다고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그러지 않은 순간에는 늘 실망했었다. 재현과 함께 있을 때는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 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또 그게 싫었다. 왜 네 곁에 있을 때는 내가 자꾸만 약해질까. 자립적이고 단단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한평생 노력해왔다. 너랑 함께 있을 때의 내가 싫어. 마침내 내린 결론은 서로에게 지워지지 않을 깊은 상흔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