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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경 Nov 26. 2020

현실과 가상의 기로에서

'라이프 온 마스'와 '매트릭스'의 연결고리(스포 포함


드라마 '시그널'과 더불어 명작으로 꼽히는 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 비슷한 형사 추리물이지만 유쾌한 요소가 더 많아서 단숨에 볼 수 있었다.



경찰인 한태주(정경호)가 연쇄 살인범을 쫓던 중 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지고, 그 혼수상태 중 그의 자아의식이 1980년대로 이동해 그곳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처음에 한태주(정경호)는 과거로 이동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대로 돌아오려 애쓰고, 종종 들리는 환각과 환청(실제 삶에서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자신에게 말하는 의사, 어머니의 목소리 등)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80년대 생활에 적응하고, 현대에서 그가 수사하던 사건과의 연결고리를 찾던 중 현실에서의 수술이 무사히 끝나 그는 깨어나게 된다. 기뻐하는 주위 사람들, 직급 승진과 사건 해결 등 현실에서의 삶은 잘 풀려나가지만, 한태주(정경호)는 여전히 혼수상태 속 삶을 그리워한다.

​(여기서부터 스포일러)
결국 그곳에서의 삶이 사실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짜깁기한 허구였다는 것을 깨닫지만, 진짜 행복한 삶은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혼수상태 속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생 드라마'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결말에 대한 궁금증에 드라마를 끝까지 볼 동력은 충분하다. 특히 허구세계를 위해 옥상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혼수상태로 돌아가는 장면은 인상 깊다는 말로는 모자랄만큼 충격적이다.



뜬금없다고 생각될 수 있겠지만, '라이프 온 마스'는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리게 한다. 이미 너무나 유명한 명작이라서 다들 알겠지만,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키아누 리브스)는 자신이 살아왔던 세계가 사실은 감각의 조작에 의한 허구였음을 깨닫고, 진실된 삶을 살기 위해 투쟁한다.

그가 진실로 속한 세계는 사실 AI와 인간들의 싸움으로 폐허가 된 지구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대한 통에 담겨 전기 자극에 의해 꿈을 꾸는 것처럼 가상현실을 살아가고 있었다. 선택된 자, The one으로 불리는 네오는 이 갇힌 사람들이 진짜의 삶을 인식하고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사실 영화 '매트릭스'는 철학적 함의가 충만한 영화인데, 철학적 분석을 보고 싶다면 책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를 추천한다. 영화에 대한 경험론, 인식론, 실존주의의 시각을 묘사해 읽는 이에게 영감을 주는 책이니까 한 번쯤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책은 한 권에 걸쳐 매트릭스의 철학적 의미를 낱낱이 분석해놓았는데, 이에 따르면 네오는 그리스 철학에서 '동굴에서 벗어나 태양을 본 사람'이다. 플라톤은 동굴에 갇힌 사람들이 그 속에서 비친 그림자를 보면서 그것이 실재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일화를 들어, 그 중 처음으로 밖으로 나와 태양을 본 사람, 그 사람은 진리를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 속 네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실이라고 믿는 것과 실재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인지한 사람이고, 이 실재의 세계를 되찾을 능력을 갖추고 있기에 동굴에서 나와 태양을 본 사람, 'the one'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 실존의 세계에 진입하기에 앞서, 네오에게는 사물의 본질을 알게 되는 빨간 약과 거짓된 현실을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파란 약 중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진다. 네오는 우리 존재 본질에서 유래하는 불안, 고통과 직면하는 빨간 약을 먹고, 스스로 진실의 사막으로 향한다.


통에 갇혀 있는 가짜 삶에서는 온갖 향락을 누리며 살 수 있지만, 네오가 깨어난 현실은 생존하기 위해 맛이라고는 없는 음식을 조금 먹는, 일종의 금욕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매트릭스(가상 현실)에서 벗어나 진실을 추구하는 네오의 무리 중 스미스 요원은 다시 가상 현실로 넘어가기 위해 배신을 감행한다.

그는 맛있는 스테이크와 와인을 음미하면서,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알지만, 모르는 게 행복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네오 일행을 배신해 적에게 넘기고 자신이 원하는 환경의 매트릭스로 넘어가려고 시도한다.

영화에서 스미스 요원은 비겁하게 나오지만, 사실은 가장 보편적인 인간상으로 보인다. 인간 본질의 고통과 불안에 맞서 싸우는 것보다, 그것이 비본래적인 삶이고 진실되지 않다 하더라도 즐거움,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어쩌면 자기 방어이며 당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라이프 온 마스'에서의 한태주 또한 그랬다. 자신이 행복감을 느꼈던 생활이 실제로는 발생하지 않았으며, 함께 동고동락하던 동료들은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했지만, 자신이 웃고 행복하게 지내기 위해 2018년의 현실을 포기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죽음을 불사한 현실 도피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본질을 외면하는 행위라고 한들, 본인이 느끼는 행복의 지속을 위해서라면 이것이 정말 비난받을 만한 일일까?




물론 '라이프 온 마스'의 한태주는 자신의 혼수상태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을 되찾고, 풀 수 없었던 의문들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결국 자신을 움직이는 질문을 쫓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흰 토끼를 쫓아가는 것 처럼 그것을 쫓아 갔고, 그 꿈나라 세계에 머무르기로 결정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나의 본질은 무엇이고, 나를 움직이는 질문은 무엇일까. 20대 초반 이 책과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당연히 나 또한 '빨간 약'을 먹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중에 생각이 또 달라질 수도 있다는 교수님의 말씀을 그 때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몇년 간 나름대로 인생이 고달파졌는지(?) 이제는 확신이 없다.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는 세상에, 본질을 외면한다고 해서 그것이 비난받을 일인가? 하지만 페미니즘에서 그 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여성 차별, 불합리한 현실에 눈을 뜨는 것을 '빨간 약을 먹었다'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것을 생각하면, 당장의 그리고 나 개인만의 편안함을 위해 파란 약을 먹는 게 비겁하긴 하다.

지금의 나는 '라이프 온 마스'를 보자마자 한태주를 이해할 수 있었다. 예전에 인셉션을 처음 봤을 때 계속 주사를 맞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꿈만을 계속해서 꾸는 사람들을 보며, 현실이 거지같아도 현실에서 살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최근에 다시 보니, 그것도 그냥 자기가 행복하면 그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남에게 피해를 주고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조금 서글프기도 하다. 나는 그만 지쳐버린걸까? 실존이며 본질을 탐구하며 살고 싶다는 어린 다짐이 옅어져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열기의 냉각일지라도, 이렇게 점점 소시민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에서 나와 빛을 보며 진리를 깨닫는 것, 때로는 피곤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어쩌다보니 또 조금 푸념글 같이 되어버렸지만, 앞으로도 이 말은 마음에 깊이 남을 듯 하다.

"You will realize that there is difference

 between knowing the path and walking the p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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