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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경 Nov 17. 2020

혼자 걷는 이집트-3

이집트 룩소르, 다합 여행기

(2017년에 다녀온 여행을 기록한 글입니다)


 많은 나라를 여행하면서 다양한 문화의 역사적 유적들을 봤지만, 그 중에서도 룩소르 신전 야간개장은 특히 인상 깊었다. 룩소르 신전은 이집트 신전 가운데 유일하게 밤에도 관광객을 받는데, 1년 중 몇 달 안 되는 야간 개장 시기를 운좋게 맞춰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어두컴컴해진 6시쯤 룩소르 신전으로 혼자 걸어가는 길, 처음 보는 남자가 끈질기게 쫓아와서 거의 뜀박질을 하게 되었다. 사람이 있는 신전 입구까지 전력질주할까 고민하는 찰나에 마주친 덩치 큰 아재들이 '무슨 문제라도 있냐, 도와줄까' 하고 물었고, 그 말을 듣고 나를 쫓아오던 남자가 뒤돌아서 모른 척 도망가는 일이 있었다. 억울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복잡한 마음을 안고 룩소르 신전으로 들어섰다.



스핑크스의 길. 해가 쨍쨍 내리쬐는 대낮의 활발함과 달리 조용한 밤에 풍기는 분위기를 좋아해서 경복궁과 창경궁 야간개장에도 갔었는데, 룩소르 신전에서도 밤 특유의 고요한 신성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제일 마음에 남았던 조각들. 아마 완성되었던 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손상되어 버린 것 같은데, 온갖 박물관과 유적들을 다니며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건축물들만 보다가 이렇게 부분만 남아있는 걸 보니 또 다른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여전히 아름다운 것. 왠지 마음이 뭉클해졌다.



글로 잘 묘사를 해 보고 싶지만 이 때 느낀 기분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기가 쉽지 않다. 사람은 거의 없고, 공기마저 착 가라앉아서 차분한 분위기에, 아래에서 위로 쏘는 빛 때문에 곳곳에 생긴 그늘이 신전과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나름 공부를 한답시고 상형문자와 그림의 의미를 외우고 책을 읽고 했는데도, 그 정보들을 받아들이는 인식의 틀이 없어서 그런지 자꾸만 까먹어서 아쉬웠다. 결국 지금 보고 있는 문양들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겉모습을 보고 감탄하다 돌아왔지만, 내용을 잘 몰라서 더 와닿았던 것 같기도 하다. 옛 서구인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리엔탈'의 신비함에 취해 있었던 것처럼.


무사히 숙소로 돌아온 그 날 새벽, 다합으로 출발했다. 다합은 시나이 반도 남부에 있는 작은 휴양지 도시인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이빙포인트 블루홀이 있는 곳이다. 수질도 좋고 산호초가 예쁘기로 유명하다고 해서, 난생 처음으로 스쿠버 다이빙을 배워보기로 결심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버스를 16시간동안 타야 한다는 거였다. 다합으로 가는 다른 방법은 카이로에서 비행기를 타고 다합 근처 도시에 내려 다시 다합으로 이동하는 게 있는데, 나는 룩소르에서 다합으로 바로 가고 싶어서 그냥 버스를 타기로 했다.

고향 내려가는 우등석 세시간도 허리가 아프다며 투덜대는 나인지라, 조금도 뒤로 젖혀지지 않는 딱딱한 의자에서의 16시간은 잠긴 문을 계속 열어보려 하는 기분이랄까, 가고는 있는건지 답답하기도 하고 막막함의 연속이었다. 자다 깨다 하면서 다시는 교통편이 불편한 국가로 여행오지 않겠다며 혼자 다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약 3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몇 살이라도 어린 22살 때 겪어버리길 잘 했다는 생각도 든다. 다신 하지 않을 것이기에ㅎㅎ


버스 정원이 40명이었는데 여자는 나 뿐이어서 사실 그것도 두려웠다. 그 중에 다행히 한국인 남자가 한 명 있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저 분이 그래도 막아주시지 않을까 하는 안도감이 조금 들었었다. 이집트는 남자 여자 지하철 칸도 따로 있고, 여성 인권이 낮아서 애초에 여자 혼자 돌아다니는 일이 잘 없어서 내가 더 눈에 띄었던 것 같다.




다른 문제는 시나이 반도가 분쟁지역이라는 거였다.
내 기억으로는 외교부 여행자제였나, 철수권고 지역이었다. 나의 목적지는 시나이 반도가 아니라 다합이었고, 단지 거쳐가야 하는 곳이라서 별 걱정을 안했었다. 그런데 새벽 네시쯤 무장 군인들이 버스에서 모든 사람을 다 내리게 해 짐을 다 꺼내고 무기가 있는지 한 명씩 검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스물 두 살의 인생에서는 아무리 격한 일이 닥쳐도 요령껏 넘어갈 수 있었는데, 총 든 군인 열댓명이 캐리어를 열고 손을 머리에 대고 있으라고 하니 정말 한없이 고분고분하게 따르며 가만히 무력함을 느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방이 캄캄한 시간에자다 깨서 어리벙벙한 모습으로 잠시 정신을 못 차리다가, 이 50명의 남자 사이에서 나는 험한 꼴을 당하기 전에 죽을 수 있을까 고민도 했었다. 다행스럽게도 나에겐 짐을 풀어헤치지 말고 먼저 버스에 올라가 있으라고 해서 조금 안도했지만,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두려움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런 일은 아주 드문 일이고 다른 시기에 같은 경로로 버스를 타고 간 친구들은 아무 일 없었다고 합니다)


마침내 눈 앞에 펼쳐진 홍해 바다. 한국의 겨울과는

다르게 이집트 다합은 2월에도 한낮에는 햇살이 마구 내리쬔다.



매일 아침 종류가 조금씩 바뀌었던 꿀맛같던 조식. 스쿠버 끝나고 숙소에 돌아와서 지쳐 잠들었다가 다음 날 아침에 따뜻한 햇살을 받으면서 먹는 이집션 밀은 행복 그 자체였다.


첫 날은 octopus world dahab divecenter (옥토퍼스 다합 다이브센터)에 가서 오픈워터 코스를 등록하고 호텔로 돌아가 쉬었고, 다음날부터 아침~오후에 걸쳐 스쿠버를 배우기 시작했다.

원래 수영을 그렇게 잘 하는 편이 아니라 걱정했는데, 물 표면에서 헤엄치는 게 아니라 아니라 완전히 수면 밑으로 들어가는거라 큰 문제는 없었다. 덩치가 엄청 큰 흑인 아저씨랑 센터 주인인 Emad 아저씨가 번갈아가면서 나를 가르쳐주고, 장기 여행 하다가 몇 달째 늘러붙어 있다는 한국인 오빠에게서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


뭐든지 시작이 제일 힘들다더니, 스쿠버를 처음 배우는 오픈워터 첫 날이 가장 힘들었다. 산소통 드는 것 자체도 무거워서 튜터들이 도와줘야 했고, 몸에 꼭 맞는 다 젖은 수트를 입는 것도 힘이 부족해서 사실 조금 그만두고 싶었다. (생각보다 물도 차가웠다!) 하지만 첫 날 하루하고 그만두는 게 자존심이 상해서 매일 가다보니 결국 재미를 붙일 수 있었다.

가끔 두려운 순간이 있기도 했다. 입에 물어서 물 속에서 산소를 공급받는 걸 옥토퍼스라고 하는데, 오픈워터 때는 일부러 옥토퍼스를 뺐다가 다시 무는 연습을 한다. 그런데 무조건 한번은 물이 코에 들어간다거나 숨을 못 쉬는 순간이 생겨서, 그럴 때 초보자는 누구나 순간 당황해서 패닉하거나 발버둥치면서 올라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때를 못 이겨내면 절대 스쿠버를 못 하는데, 같이 시작한 다른 분은 패닉이 와서 이틀 차에 결국 그만 두었다.

나도 코로 물을 들이켰을 때, 순간 숨을 못 쉴 때 두렵긴 했다. 그런데 그래도 살려줄 수 있으니까 선생님들이 시킨거겠지, 하는 믿음이 있었고, 솔직히 홍해에서 스쿠버 강습 받다가 죽는 건 나름 꽤 괜찮은 죽음(?)이라는 체념을 해서 오히려 엄청 차분해질 수 있었다. 이런 종류의 체념은 만성적인 우울함에서 나온 거라 좋지 못하지만, 스쿠버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차분함이 맞긴 하다.




'인생샷'을 건지려고 수영복도 새로 사서 갔는데, 입긴 했지만 결국 제대로 된 사진은 남기지 않았다. 아침 일찍 센터에 가서 오전 다이빙을 하고, 점심 먹고 오후 다이빙하고 나면 각 잡고 사진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겨를이 없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을 과하게 들여다보는 건 현실의 삶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이 때는 마냥 행복하고 곁에 있는 사람들과 있는 게 즐거워서 사진을 남겨서 어디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정신 차리니 어느 새 3일차 오픈워터 자격증을 따고 어드밴스 자격증을 배우고 있었는데, 정말 하루하루 가는 게 너무 아쉬웠다.
다이빙 센터 사람들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건 다이빙 그 자체였다. 이 때만 해도 우울함과 힘듦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던 시기였는데, 물 속에만 들어가면 그런 게 다 사라졌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적막 속에서 내가 숨 쉬는 소리만 들리고, 내가 호흡하고 살아 있다는 거, 그걸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기분은 의외로 꽤 좋았다. 잡념은 다 사라지고 온전히 나한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라 행복했다.

스쿠버도 곧잘 하게 되어서, 세계 3대 다이빙 명소인 블루홀에도 데려가 주셨다. 만화로만 보던 니모랑 도리도 보고, 산호초와 신기한 수중 생물들을 가까이서 아주 많이 볼 수 있었다.

다합에서 혼자 햇살 받으면서 이론 공부하던 시간. 사진만 봐도 저 때의 행복감이 다시 떠오른다.

다합에 간 여행자들 다수가 이동 일정을 취소하고 다합에 계속 머무르려고 해, 다합은 '여행자들의 블랙홀'이라 불린다. 또, 다합에 한 번 온 사람은 꼭 다시 돌아온다고 하기도 한다. 나 또한 시간이 가는 게 하루하루 아까웠으니...지금은 스쿠버 하는 법도 까먹고 다시 다이빙이 낯설어졌지만 언젠가는 꼭 다시 한번 가고싶다.


카이로 어느 골목의 가판대

내가 보고 느낀 이집트를 한 장으로 요약해둔 듯하다.


아무도 신호도 안 지키는 엉망진창 교통에다 여자가 살기엔 힘든 곳임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칙칙한 건물들 사이에서 다시 돌아보면 눈에 띄는 뭔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누구라도 한 번 발견한 뒤엔 계속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언젠가 꼭 다시 갈 수 있기를 바라며...

이집트 여행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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