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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향 Nov 30. 2023

나 제법 주부 같은데?

둘째 딸은 잘할 거야. 

지난 주말 저녁 지인들과 가벼운 모임이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못 만난 지난 두 달간 있었던 일들을 나눴다. 연애 4개월 차 된 B의 달달한 연애 이야기, 병원 검진을 다녀온 이야기, S의 회사에 있는 미친놈 이야기 등 소재는 끝도 없이 나왔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있었는데 슬그머니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시간을 보니 밤 10시다. 나의 졸음을 눈치챈 B가 물어본다. 


"언니 졸려?"

"어.... 졸리기 시작했어. 나 요즘 10시만 되면 내 방에 들어가거든. 그때부터 나의 쉬는 시간이야."

"그럼 그전에 방에 안 있고 머 하는데?"

"그전에 거실, 주방에 있지. 집안일 하지."

"...... 아!!"


알람 같은 나의 졸음 덕에 우리는 약속한 10시에 모임을 끝냈고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B는 꽤나 가까운 동생이지만 6개월 전과 지금의 내 삶이 달라진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주부로서의 나의 삶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하다. 나도 이제야 내 삶에 적응이 되어가니 말이다. 




새벽 6시가 되면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전 같으면 엄마가 아빠의 아침을 챙기는 소리였겠지만 지금은 아빠 스스로 아침을 챙겨 먹는 소리이다. 국이든 찌개든 데워먹기만 하면 될 정도로 준비해 놓으면 아빠는 혼자서 아침을 챙겨드시고 출근하신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얼마 간은 내가 새벽 6시에 일어나 아빠의 아침을 챙겼다. 하지만 아직은(?!) 아침잠이 많은 나이인지라 그 시간이 쉽지가 않다. 아침은 알아서 챙겨 먹고 가겠다는 아빠의 말을 덥석 물고서 '그래 너무 다 하려고, 다 잘하려고 하지 말자.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라는 마음으로 이른 기상은 과감히 포기했다. 


오늘도 문 너머로 들리는 소리에 잠이 살짝 깼다. 하지만 몸은 여전히 수면상태이기에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 다시 수면모드로 들어간다. 아빠는 출근을 하셨고 나는 알람에 소리에 맞춰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오늘은 종일 외근이 있는 날이라 급하게 처리할 업무를 위해 조금 일찍 출근을 할 생각이었다. 정확하게는 생각만 있었다. 뭉그적거리다 지각을 겨우 면했다. 외근을 마친 후 돌아와 마감하지 못한 일들을 마무리하고 살짝 늦은 퇴근을 했다. 


'저녁은 멀 먹지?'


그저께 만들어둔 돼지찌개와 참치김치찌개가 생각났다. 퇴근길 마음이 든든하다. 집에 가는 길에 소고기 국거리와 대파, 무 하나를 사서 들어왔다. 저녁 준비를 하며 냉장고 열어보니 샐러드에 곁들일 닭가슴살을 다 먹었다. 저녁 준비를 하는 동안 닭가슴살을 삶아야겠다. 야채칸에 조금 남은 알배추가 자꾸 눈에 걸린다. 빨리 처리해야 할 것 같다. 알배추를 쓱쓱 대충 썰어서 고모가 주신 김치 양념에 버무렸다. 사온 반찬들을 그릇에 담고 찌개를 데우는 동안 닭가슴살은 적당하게 잘 익었다. 아빠는 참치김치찌개, 나는 남은 돼지찌개로 오늘 저녁도 맛있게 잘 먹었다. 


설거지를 하기 전 냉동실에 잠시 넣어둔 소고기를 미리 꺼내놓았다. 내일 아침 국은 '소고기 뭇국'이다. 설거지를 마친 후 싱크대를 한번 정리하고 아침 준비를 한다. 국에 들어갈 무와 파를 미리 썰어 접시에 담아놓고 다진 마늘도 미리 꺼내놓는다. 적당히 해동된 고기와 무를 참기름에 살짝 볶다가 물을 붓고 한참을 끓인다. 나의 시간은 소중하기에 국이 푹 끓으면서 맛을 내는 동안 오늘 사온 대파를 정리하고, 밥 먹기 전에 삶아둔 닭가슴살을 먹기 좋은 크기로 찢어 놓을 생각이다. 


'나 제법 주부 같은데?' 


대파를 썰다가 알게 된 뜬금없는 깨달음(?!)이었다. 2,3개월 전만 해도 '밥 해 먹기'가 가장 크고도 무거운 과제였는데 지금은 일과 정도로 여겨지는 듯하다. 주부로서의 나의 삶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싱거운 진리를 대파를 썰다가 깨달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언니에게 말하기를 내 걱정이 안 된다고 했다. 그게 머든 잘할 거라고 했다. 내 걱정은 나만 하고 있었다. 엄마는 지금의 내가 이럴 줄 알고서 그렇게 얘기한 것 같다. 엄마는 역시 모르는 게 없다. 나를 향한 엄마의 믿음이 나를 만들어 주고 있는 것 같다. 


그저께 했던 미역국도 참 맛있었는데, 내일 먹을 소고기 뭇국도 참 맛있게 됐다. 마음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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