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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향 Feb 14. 2024

배려하지 않은 배려

커피 포트의 물의 양

내가 일하는 사무실 사람들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커피 포트를 사용한 후 물을 끝까지 가득 채워놓은 사람, 2~3잔 정도의 물만 채워놓은 사람, 남은 물의 양은 관심도 없는 유형이다. 첫 번째 유형의 사람은 내가 물을 사용했고 뒷사람이 물을 채워 넣어야 하는 수고를 줄이기 위해 물을 가득 채워 넣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두 번째 유형은 효율에 대해 이야기했다. 차 한잔을 위해 1리터가 되는 물을 끓인 다는 것은 전기낭비, 시간낭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적정량의 물만 넣어둔다. 세 번째는 그냥 건너뛰기로 하자.  


첫 번째와 두 번째 유형의 액션과 이유는 달랐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 둘 다 '타인을 향한 배려의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려는 내가 불편함을 느낀 그 포인트를 가지고 한 배려이다. 그런 것들은 역설적이게도 '타인을 배려하지 않은 타인을 위한 배려'가 되기도 한다.  


작년 11월 넷플릭스에서 오픈한 드라마가 있다. 배우 박보영이 주연한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라는 드라마이다. 박보영이 연기한 '3년 차 간호사 정다은'이 내과병동에 있다가 정신병동으로 로테이션하면서 겪게 된 이야기가 담겨있다. 정다은이 내과병동에서 일하던 시절 동료 선생님께 이런 얘기를 듣게 된다. 


"환자 분들 배려하는 거 가지고 머라 하는 게 아니라요. 다은쌤 몫까지 다른 쌤들이 다 해야 해서 그걸 머라고 하는 거예요. 좀 보세요 여기 할 일이 산더미인데 다 밀려있잖아요."


정다은이 로테이션된 이유도 그래서였다. 환자들은 친절하고 배려있는 정다은 간호사를 좋아하지만 그로 인해 다른 일이 더뎌졌고 동료 간호사들은 그녀의 몫까지 하느라 더 바빠졌다. 환자들을 배려하느라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겐 민폐를 끼친 것이다. 그로 인해 내과수쌤은 정다은에게 로테이션을 권유하고 과가 바뀌게 되었다. 


정다은이 환자를 배려한 그 행동이 틀린 것이 아니다. '의사의 진료를 돕고 환자를 돌보는 것'이 간호사의 역할이기에 정다은이 환자를 배려한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동료 간호사의 말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주사와 약을 정리하고 차트를 정리하는 것 등의 일도 환자를 돌보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기에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른 경우, 신호등이 없는 교차로 사방에서 차가 왔다고 치자. 내가 왼쪽에서 오는 차가 먼저 가도록 배려하는 동안 내 뒤에 있던 차는 잠깐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만약 뒷 차에 화장실이 급한 사람이 있었다고 치면 그것만큼 민폐는 없었을 것이다. 우린 서로의 사정을 다 알지 못하기에 누군가를 배려하는 동안 다른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한다거나, 정다은처럼 동료에게 민폐를 끼칠 수 있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결국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완벽한 배려는 없다. 신이 아닌 이상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쓰는' 그 행위의 방식이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배려를 받는 동안 다른 누군가는 조금의 희생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반대로 나의 작은 희생의 순간에 누군가는 최고의 배려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물이 가득 찬 커피 포트를 보며 '미리 채워뒀구나' 생각하는 것이고, 절반만 차있는 커피 포트를 보며 '시간을 아껴주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남은 물의 양에 관심도 없는 사람은 제쳐두고서 말이다.  그리고 나 자신은 없고 타인만을 위한 배려도 제쳐두고서 말이다. 누구에게도 강요당하거나 강요하지 않으면서 지금 내가 기꺼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밤늦은 시간이다. 아버지는 주무시러 들어갔고 조용한 거실에선 나의 타자소리만 울린다. 지금 내가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배려를 해야겠다. 글을 마무리하고 노트북을 덮고 자러 들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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