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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향 Oct 28. 2023

좋은 계절이잖아요

마음가짐

엄마가 '다발골수종'이라는 혈액암 환자로 확정이 된 것은 2015년 3월이었다. 병명이 확정된 후 병에 대한 설명과 앞으로 치료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방사선, 자가골수이식, 항암제 투약 등의 과정들이 있었다. 다행히도 내가 쉬는 날이 월요일이었기에 병원의 많은 병원 일정은 월요일에 맞혀졌다. 엄마의 병원 길에는 내가 동행하는 날들이 많았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많은 분들이 나를 향해,


“네가 고생이 많았다. 집에서 엄마 돌보고 병원 같이 다니느라 고생 많았다."


꼬박 8년의 시간이었다.


장지에 마지막으로 흙을 뿌리면서 엄마에게 건넨 말이 있었다.


"8년 동안 엄마의 보호자로 있으면서 힘들다고 생각한 적 없었어. 엄마의 발을 씻겨주고, 엄마의 몸을 씻겨줄 수 있어서 나는 행복했어."


지나고 보니 그랬다. 마음이 눌리고 몸이 고된 순간들이 분명 있었겠지만 지나고 보니, 그렇게 얘기할 수 있었다. 엄마가 혼자 씻는 것이 힘든 몇 번의 시간이 있었다. 욕실에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건네면서 엄마를 씻기는 그 순간이 행복했다. 무엇보다 대야에 온수를 받아 퉁퉁 부은 엄마의 발을 씻기는 것은 자식으로서 누리를 수 있는 특권이라 여겼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애초에 '내가 해야 하는 거구나.'라는 다짐 덕분이었다.


일을 쉴 수 없는 아버지, 자녀 셋을 키우는 언니, 서울에 살고 있는 남동생. 본능적으로 '엄마의 보호자  역할은 내가 해야 하는구나.'라고 생각을 했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겼고, 이미 내 것이라고 도장을 찍었기 때문이다.


엄마를 보낸 후 듣게 되는 말들 중 내 어깨에 100kg 정도의 짐을 올려놓은 거 마냥 느껴졌던 것은


'이제 니 살림이네.'


모르지 않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몇 십 년 동안 엄마의 주방이었던 공간을 내 것으로 가져와야 했다. 아니 나에게 던져졌다. 내 살림의 시작은 당연히 결혼이나 독립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시작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내가 해야 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굳이 주변에서 반복적인 상기를 하지 않아도 말이다. 가슴이 떡 막히는 말이었다.


요리를 좋아하는 쪽이고 겁도 없고 심지어 못 하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부엌일을 하시는 엄마 옆에 붙어 있는 것을 좋아했고 덕분에 곁눈질로 배운 것들이 많았다. 뚝딱 해내지는 못해도 아빠를 굶기지 않을 자신감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빠의 밥을 챙기고 살림을 하는 것은 나에게 너무 버거운 일이 되었다. 아빠는 아무거나 먹어도 된다고, 아무거나 잘 먹는다고 했지만 나는 아빠 딸이지 않은가. 아빠의 예민한 입맛을 모르지 않는다. 밖에 음식은 잘 안 드시는데 드시고 싶은 건 많고 짠맛과 싱거움에 유독 예민함을 가지고 있는 아빠였다.


‘무얼 해 먹고살아야 하나?’


버거움이 걱정이 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음식을 손수 해온 엄마 덕분인지 때문인지 아빠에게 밖에 음식을 드리는 것에 먼지 모를 죄스러움이 있었다. 결국 엄마만큼 잘해야 하고 내가 다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오는 생각이었다.


“누나 뭘 할 생각 하지 말고 그냥 사 먹어. “


동생의 조언에 힘입어(?!) 동네 맛있는 반찬 가게를 찾기 시작했다. 작은 동네에 반찬 가게가 이렇게나 많은지 몰랐다. 마트에도 밀키트와 각종 찌개, 국 패키지가 이렇게나 많은지 몰랐다.


‘다들 이러고 사는구나.’


위안이라고 해야 하나, 마음의 여유를 조금 챙길 수 있었다. 일이 고되었던 날의 저녁은 배달 음식을 시킨다거나, 퇴근이 늦은 날에는 다음 날 아침으로 포장된 국이나 찌개를 사들고 들어갔다. 몸과 마음에 여력이 되는 날에는 반찬을 한 두 가지씩 해놓기도 하고 더 여유가 될 때는 간단한 김치를 담가보기도 했다.


살림을 하고 밥을 해 먹는 게 왜 이리 버거운 것일까? 내가 가진 버거움을 극복하고 싶었고 이유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마음가짐이었다.


직장에서도 일이 많지만 그것이 버겁다 여겨지지 않는 것은 능동적인 마음의 자세가 있었다. 내가 다 하지 않아도 되고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는 생각도 크게 작용했다.


엄마의 주방은 내 것으로 갖고 오고 싶지 않았다. 내가 느껴야 하는 책임감은 마음에 바위덩이 하나 올려놓은 것만 같아 던져버리고 싶었다. 엄마의 부재, 엄마가 없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도 함께였다. 그래서 이건 내 것이 아니라며 애써 피하고 외면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아빠가 함께 있고 반찬을 챙겨주는 고모와 이모가 있고 집 밖으로만 나가면 먹을 것이 천지인데 다 내가 해야 하는 것으로 붙들고만 있었다.


“삶을 즐기는 것은 ‘~해야 한다’는 말을 줄이고, ‘~하고 싶다’는 말을 늘려 나가는 것이 그 시작이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못 당하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 그리고 의무감과 책임감만으로 살아가기엔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김혜남)


곳곳에 색색의 딘풍이 지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기만 하다. 의무감과 책임감으로만 보내기엔 너무 아까운 짧은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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