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못한 시간도 글이 될까

병적인, 앞으로, 깜짝/스파이글쓰기

by 슈가정원

시간이 지날수록 키보드 위 손이 머뭇거린다. 그리고 여지없이 일기가 아닌 글을 쓸 자신이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깜박이는 커서의 움직임을 노려보곤 한다. 세월이 흐르면 연륜이 쌓여 그럴듯한 에세이 한 편은 뚝딱 써 내려갈 줄 알았다. 지독한 허상이었음을, 깜짝 놀랄 만큼 나는 이제야 깨닫는 중이다.



박완서 작가님의 <한 말씀만 하소서>를 읽으며 그녀의 다산 다난한 삶의 여정이 결국 이토록 사무치는 글로 세상에 보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심지어 상상도 하지 못할, 처절한 자식 잃은 아픔마저 살짝 부럽다. 여전히 애송이 같은 삶만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는 삶의 글감이 없다는 오만방자한 생각이 가득한 시절이라 이런 막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입이 방정이라고,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써야 하는데 쓸 수가 없을 때, 가끔 병적인 생각으로 내 삶의 굴곡이 생겨 사는 것은 힘들어도 토해낼 감정이 있어 '글'이라는 목적에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미친 생각에 이르곤 한다.



전업작가도 아니면서 미천하고 아둔한 생각까지 하는 내가 우습다. 어디 내놓고 말하기도 민망하지만 어쩌면 나와 비슷한 위치에서 글을 쓰려는 많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하나의 통과의례인지도 모른다.

'꼭꼭 숨어라, 마음까지 들킬라.'

몇 번이나 두드렸다가 지워지는 숱한 문장들, 마무리되지 못한 채 저장된 파일들, 괜히 커서만 바라보던 시간들은 정말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인가.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을 사연이 필요하다고 믿는 내가 보인다. 그래서 상처나 비극, 견뎌내는 시간 등이 일상에서 보이지 않아 괴로워하는 건 아닐까. 쓸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삶이 아직 충분히 깊지 않다는 막연한 열등감으로 인해 멈추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박완서 작가님의 글을 다시금 떠올리면, 그녀의 문장은 고통 그 자체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힘을 얻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내가 쓰지 못하는 이유는 삶이 평탄해서가 아니라, 아직 내 삶을 충분히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글을 쓰기 위해 반드시 불행해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특별할 것 없는 하루를 특별하지 않다고 넘겨버리는 태도, 그 무심함이 나를 키보드 앞에서 멈추게 했던 건 아닐까. 쓰지 못한 시간은 실패가 아니라, 아직 문장으로 옮겨지지 않은 삶이었을 뿐이다. 결국 커서가 깜빡이는 그 시간들 역시, 이미 글의 일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