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年, 春
당신,
그곳에서 잘 지내는지요.
저는 벌써 아흔 살을 훌쩍 넘어버렸답니다. 세월이 정말 빠릅니다. 일흔이 조금 넘었던 당신은 3년을 앓아누워있다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시지요? 당신의 둘째 아들 영철이는 아직도 당신을 애달프게 그리워한답니다.
충남 버들골 시골에서 갓 새 잎이 나온 초여름 나무 같던 당신을 만나 평택 동리로 혼례를 치르러 제 짐을 지고 길을 나서던 것이 엊그제 같습니다. 그날은 하얀 봄꽃이 바람과 함께 떨어지고 있는 늦봄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저는 당신 집 마당에 서 있었지요. 몇 번은 마을 사람들이 돌려 썼음 직한 병풍이 혼례상 뒤에 차려지고 저는 뒤편에 고개를 푹 숙이고 연지 곤지를 바른 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랑! 관대 정제하시오!’
그 말을 들은 순간 제 가슴은 방망이질을 쳤습니다. 스물두 살의 혼기가 차고도 넘치는 제가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 옆에는 당신네 동네에 자리를 잡고 사는 고모네 막내딸 명자가 서 있었습니다. 그이는 저에게 외국물까지 먹은 냥반이 왜 버들골에서 드세기로 유명한 계집하고 결혼을 하냐며 진담이 섞인 농을 쳤었지요. 맞절하라는 말이 들리고 고개를 숙이는데 족두리가 떨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당황하여 급하게 허리를 피자 명자가 한 손으론 제 족두리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팔을 꽉 누르며 눈치를 주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엉거주춤한 제 모습이 우스워 얼굴이 붉어지는데 그때 당신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당신은 새하얀 박꽃처럼 달빛같이 웃어 주었습니다.
막내딸이 시집가는 날. 우리 어머니는 마치 모든 것을 보되, 아무것도 눈에 담지 않고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잘 살라는 말과 함께 사라지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참 슬펐습니다.
이윽고 맞이했던 혼례의 밤. 그 시간은 저에게 아주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당신의 크고 또렷하던 눈과 맞잡았던 손. 남은 생을 이 사람을 의지해서 살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과 내 편이 생겼다는 든든함에 마음이 보름달처럼 부풀어 올랐던 1950년 늦봄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혼례 이튿날부터 이전과 꼭 같은 삶을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힘든 노동을 해 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의 삶은 장소만 방직 공장에서 평택 동리로 바뀌었던 것이었습니다. 시모는 새벽녘부터 저를 흔들어 깨워 동네 우물이며 농사를 짓는 땅들 하며 빨래터를 전부 저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소문대로 제법 농사를 많이 하시더군요.
저는 마치 이곳에서 계속 살았던 사람처럼 아침을 짓고, 물독을 채우고 식사를 만들었습니다. 정리가 끝난 후 저는 잠시 고모 댁에 들러 인사를 하고 와 나머지 집안일을 하겠다고 했지요. 그 말에 시모는 저의 왼뺨을 내려쳤습니다. 너무나 당황하여 눈물조차 나지 않더군요. 당신은 아침 술을 뜨자마자 만주에서 사귀었던 친구가 왔노라며 저에게 돌아올 때 제가 좋아한다던 소설과 잡지책을 몇 권 가져다주겠다 약조를 하고 출타를 하셨더랬지요. 제가 기어코 고모 집에 간 것을 두고 시모는 돌아가실 때까지 저의 성질 머리 탓을 했습니다. 저의 마음 같아서는 그냥 모든 것을 두고 버들골로 다시 가고만 싶었습니다만 저는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저녁이 되어 당신이 돌아왔습니다. 중절모를 쓴 당신은 정말로 멋진 신사였지요. 저는 퉁퉁 부은 제 손이 미워 괜스레 앞치마 안으로 손을 감춰보았습니다. 그러자 당신이 제 손을 끌어당겨 잡지책을 올려주었습니다. 저는 그날 당신에게 차마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제 성격 같아서는 그냥 모든 것을 다 쏟아붓고 당신 곁을 떠날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버들골에는 더 이상 언니들도 없습니다. 제가 집으로 간다고 해도 어머니는 저를 반겨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혼례를 치르기 전 둘째 언니가 저에게 당분간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보지 못한 것처럼 조용히 지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해 주었기 때문에 조금 더 참아보자란 마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저의 이름을 다정히 부를 때, 싱긋 박꽃 같은 미소를 지어줄 때 저는 모든 것을 참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바보 같지요.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다가왔습니다. 1950년 6월의 시원한 초 여름날이었지요. 시모가 밭에 나간 사이 명자가 망태기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와 이렇게 외쳤습니다.
‘느 남편 대서소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 한의원에서 사원으로 일하는 거 알고는 있냐?’
그리고 당신이 밤마다 공부 모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빨갱이 짓을 하러 다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명자가 가져온 참외 광주리를 확 뺏어 토실하고 큰 놈으로만 꺼내어 툇마루 위에 놓고는 망태기를 던지듯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명자는 기분이 팍 상한 얼굴로 사립문 밖으로 나섰습니다. 사실은 저도 희미하게 눈치를 채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벗은 옷가지에서 연하게 약재 냄새가 나거나 어떤 날은 감초나 한약재 뿌리들이 떨어질 때도 있었기에 말입니다.
하지만 밤마다 빨갱이 짓을 하러 밖으로 나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시 삼팔선을 사이에 두고 위는 소련, 아래는 미국이 대신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고 아주 배포가 큰 사람들만이 그 사이를 왕래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빨갱이들은 단체로는 맞는 소리들도 많이 하지만 각 사람들의 목소리는 전부 묵살해 버린다고 하더군요. 저에게 당신은 세상의 온갖 재미난 것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하늘에 거미줄을 달고 달리는 전차와 땅 속 깊은 곳을 다니는 철마는 당신이 아니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을 알려 주는 재미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코뮤니스트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당신은 누구보다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 아니었던가요.
하지만 명자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지요. 하지만 그것은 그다지 큰 문제도 되지 않았어요. 우리 사이에는 더 큰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아니지요. 어쩌면 저의 인생에게만 그 일이 불쑥 끼어든 것일 겁니다. 아닙니다. 당신들의 삶에, 당신들의 행로에 제가 불쑥 나타난 것이지요. 밥을 지어 올리는 제 팔뚝을 보고 시모가 스치듯 했던 말을 저는 좀 더 붙잡고 늘어졌어야 했었습니다. ‘되진 년 보다 낫다’라는 그 말을요.
명자가 돌아가고 저는 흰 무명천을 덧대어 만든 걸레로 툇마루를 박박 닦고 있었습니다. 그때 옆 마을 시부의 형님 되시는 분 그러니까 큰 아버님이 웬 아이를 업고 나타나셨습니다. 저는 인사를 하고 시원한 윗목으로 그분을 모시고 아이에게는 단물을 주었습니다. 큰 아버님 손주처럼 보이는 네댓 살가량의 아이는 익숙하게 당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갑을 열고 이것저것을 꺼내어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런 아이에게 이런저런 말을 붙이다가 가마솥에 넣어둔 된장국이 생각나 얼른 발걸음을 부엌으로 옮겼습니다.
이윽고 시모가 밭에서 돌아왔습니다. 날도 더운데 방문을 닫고 두 분은 한참 이야기를 나누셨지요. 이윽고 어머니는 저를 불렀습니다. 아이는 방안을 헤집고 다니다가 자꾸만 시모의 무릎 위로 올라가 앉더군요. 그 모양이 몹시 이상했습니다. 아이의 앞머리는 눈을 찌를 만큼 자라 있었고, 코는 누렇게 말라붙어 있었습니다. 그때 당신이 집 안으로 당도했습니다. 당신은 댓돌 위에 한참을 서 있더군요.
내가 당신 앞에 보리차와 담뱃갑을 내려놓았습니다. 앉아있는 당신의 무릎 위로 익숙하게 아이가 옮겨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이가 어깨를 타기도 하고 안경을 벗기기도 하자 당신은 ‘어허. 그만.’ 하고 아이를 안아 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저는 그때 벼락같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저에게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저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당신의 아이였던 것입니다.
당신은 저에게 연신 미안하다고 말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미리 다 말하지 못하였다고, 사실 제 자리 이전에 혼인을 한 적이 있었다고요. 몇 년 전 전처는 병사하고 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하나 있다고 말이지요. 그 말을 하는데 시모는 저의 눈치를 보고는 아이를 데리고 말없이 부엌으로 사라졌습니다. 저는 정신이 아득해지고 모든 것이 다 미웠졌습니다. 고모부터 김약국 아저씨, 버들골의 어머니까지. 다 아시면서 저만 몰랐던 것인가요?
원망이 아침 해 뜨듯 터져 나왔습니다. 결혼 전에 저에게 알려주었어야 했던 것인데, 당연히 내가 알았어야 했는데 아무도 저에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마을 사람들조차 쉬쉬거리며 저에게 입을 다물었던 것입니다.
스물두 살의 평범하고 가난한 반 과부의 딸이 어떻게 당신같이 새 초록한 선비에게 시집을 올 수 있었는지 저는 그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제 팔뚝이 굵고 튼실하다며 명이 길겠다고 했던 시부의 말도 떠오릅니다. 저는 그 자리를 박차고 마을 끝까지 뛰어 나갔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마을 밖으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습니다. 버들골의 어머니는 이 모든 것을 알고도 저의 혼사를 밀어붙였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날 산비탈에 앉아 울고 또 울었습니다.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취직한 방직공장에서 고된 노동에 엄지 검지 지문이 지워졌을 때에도 이토록 마음이 괴롭지는 않았습니다. 그날 당신은 마을 전체를 돌고 또 돌아 저를 찾아다녔다고 했지요. 사실 저는 당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나무 그림자 깊숙이 몸을 숨겼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쏟아내고서야 저는 터벅이는 걸음으로 명자의 방문을 열었습니다.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말할 힘도 없었지요. 내일 생각하자. 일단 잠을 자고 동이 트고 나서 드는 첫 번째 생각대로 하자고 결심했습니다.
그 다음날 자초지종을 들은 고모는 가만히 숨을 죽이다 말을 이었습니다. 일단 혼례를 올렸고, 네가 연을 맺은 그 집안이 이 동리에선 밥술도 어렵지 않게 뜨는 집일뿐더러 아직 아이도 어리니 알뜰살뜰 기르면 너를 어머니라 생각하고 아이도 따르지 않겠냐고 말이지요. 저는 고모에게 이 사실을 알고 있었냐고 도끼눈을 뜨며 물었습니다. 고모는 ‘네 어머니가……’하다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습니다. 당시 남한 땅이었던 개성에서 일을 하다 평택에 내려온 지 얼마 안 되는 명자는 고모를 쏘아보더니 저의 손을 꼭 잡아주었습니다. 저는 마당에 주저앉아 다시 펑펑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당신이 저를 찾으러 왔습니다. 당신의 자전거가 사립문 앞에 멈춰 서고 저는 홱 돌아앉아 방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버텼습니다. 당신은 명자 방 안으로 들어와 저의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당신도 다시 결혼할 마음은 없었다고 말했지요. 시모는 아이를 큰 아버지댁에 영영 입양 보내버렸다 말을 했고, 당신은 대서소에서 일을 하다 만주에서 코뮤니스트 활동을 했던 것이 밝혀져 한의원 사원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초 한약 재료를 사러 여느 때처럼 버들골 김약국에 들렀다 저를 만나게 되었다 했습니다.
‘왜 속였어요. 말을 하지요.’
저의 말에 당신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습니다.
‘미안하오. 내 잘못이오.’
당신은 끝까지 저를 설득했습니다. 함께 살자고 말이지요. 저는 당신의 뺨을 후려치고도, 모른 척 당신의 손을 잡고도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결국 당신과 함께 아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형철이가 있는 그곳으로 말이지요. 지금 돌아보면 당신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간 형철이도 참 불쌍하단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어려 저를 금방 엄마로 알고 따를 거라던 고모의 말대로 모든 것이 쉽게 풀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어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느껴본 적 없는 스물두 살의 여자가 하루아침에 아이 엄마가 되어야 하는 일이 저에게는 무척이나 까다롭고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형철이와 정을 붙이기도 전에 더 큰 소용돌이가,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비웃는 듯 모든 것을 집어삼켜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