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이야기
-이영-
잠시 숨 돌릴 새도 없이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던 8월이었어. 내가 너를 처음 만난 날.
아니, 정확히 얘기하자면 네 존재를 처음으로 의식하게 되었던 날이겠지.
토요일 늦은 오후 신촌 거리는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무수히 지나치는 골목이었지. 햇살이 뜨거운 건지 젊고 열정적인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서 더 뜨겁게 느껴지는 건지 헷갈리는 날이었어. 나도 뜨거움에 합류했다가 항복하고 스타벅스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고 벌게진 얼굴을 식히고 있었어. 원래는 친구랑 좋아하는 와인바에 가기로 했었는데 그날따라 친구가 연락이 없었어. 만나기로 한 지 두 시간쯤 지났을까 연락이 오더니 왜 아직 혼자 있냐고 친구가 도리어 놀라 내게 물었어.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생각한 나는 책을 읽느라 시간이 그만큼 지난 줄도 몰랐거든. 원래는 소개팅 자리였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었지. 친구도 소개팅 상대방도 내 눈앞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친구는 연신 미안해했고, 지금이라도 채비하고 나온다는 걸 내가 말렸어. 아마도 나는 그때 읽고 있었던 책이 너무 재미있었고 또 나온다는 친구가 귀찮기도 했을지도 몰라. 다음에 보자고 무덤덤하게 전화를 끊고 나는 읽던 책에 다시 빠져들었지. 내 옆 테이블에 사람들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 모를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정신을 차려보니 세 시간이나 지나 있었지 뭐야.
시간을 확인하고 나니 불현듯 배고픔이 몰려왔어. 아…… 뭐든 너무 먹고 싶은데 또 아무거나 먹을 수 없는 거야. 왜냐하면 그날은 네가 알다시피 내 생일이었거든. 물론 나도 몰랐던 소개팅남도, 내 친구까지도 당연히 몰랐던 사실이고. 그냥 이대로 생일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어. 그래서 원래 가기로 했던 와인바를 가기로 결정했지. 너도 알겠지만, 그 와인바에서는 어떤 안주를 시켜도 일품이니까. 내게는 그 와인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안주인 ‘헬게이트 나초’를 먹어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생긴 거야. 망설일 이유는 하나도 없었지.
마지막 장을 향해 달려가는 책은 와인바에 가서 느긋하게 다시 읽기로 하고 책장을 덮었어. 막 생각만 해도 입 안에 침이 고였지. 하지만 왠지 헐레벌떡 가고 싶지는 않았기에 느긋하게 자리를 정리하고 스타벅스를 나섰어. 그 스타벅스에 네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였지. 그때 나는 너를 몰랐으니까.
와인바에서 바 테이블에 앉아 글라스 와인 한 잔과 먹고 싶었던 ‘헬게이트 나초’를 내 눈앞에 두었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 어쩌면 나는 본래 내 생일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서만 보내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마치 진짜 고향에 온 것처럼 몸도 마음도 느긋해졌거든. 혼자서 나직이 ‘해피 버스데이 투 미’를 속삭이고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을 때, 그때 네가 내게 말을 걸었을 거야.
“저, 혹시 혼자 오셨어요?”라고 내게 불었어. 그때 그녀는 진한 스모키 화장을 하고 온몸을 검은색으로 입은 터라 마치 매혹적인 드라큘라나 저승사자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지. 혹시 이 여자 내게 대쉬를 하는 건가?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니까. 그러다 스모키한 화장에 감춰진 부드러운 눈매를 보았어. 왠지 어디서 본 듯한 눈에 익숙한 눈매였거든. 그때는 몰랐지. 네가 가지고 있는 그 눈매가 내가 아는 누군가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선약이 있었는데 취소됐어요.”
“그럼, 우리 같이 한잔할까요? 아, 저 지금 애인 있냐고 묻는 거 아니에요. 생각하시는 그런 쪽 취향은 아니거든요.” 하고 내게 윙크를 날리는 네 모습이 터프하게 보여지는 네 모습과 상반되어 살짝 귀엽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리고 내 생각을 어떻게 알았는지 내심 깜짝 놀랐어. 나 사실 살짝 오해할 뻔했거든.
‘그럴까요?’라고 내가 말했지. 조금 멋쩍기도 했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너는 내 옆에 있는 의자를 빼고 자연스럽게 앉았어. 앉는 모습도 얼마나 우아한지 서울 촌뜨기로 자란 나와는 너무 달라고 멋있기도 하고 생경하기도 했어. 너는 자연스럽게 바텐더에게 기네스 생맥주를 시켰어. 마치 단골손님처럼. 기네스 생맥주는 신촌 일대에서 유일하게 이 바에서만 취급했거든. 네가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이 왠지 반갑게 느껴졌달까? 그래서 내가 먼저 말을 꺼냈어.
“이영 이에요. 성은 이, 이름은 영. 만나서 반가워요. 기네스 생맥의 맛을 아는 사람이라니 더 반갑네요.”
내 말을 네가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너는 갑자기 푸하하하 웃어버렸어.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너를 쳐다봤지. 네가 너무 갑자기 웃어서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눈길이 한꺼번에 우리 둘에게 쏠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심지어 바텐더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왜? 하는 투로 어깨를 으쓱했지 뭐야.
너는 다 웃고 나서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어. 네 이름도 나랑 똑같다고. 우리 운명 아닐까요? 하면서 말이야.
‘이름이 똑같다고? 그럼 너도 이영?’ 했더니 너는 ‘아니, 나는 오영. 성은 오, 이름이 영. 오영. 똑같지?’
성은 달랐지만 어쩜 이름이 외자인 것도 똑같다는 사실은 내게도 운명처럼 다가왔던 것 같다. 네 이름을 듣는 순간 내 몸에서 마치 전기라도 통한 것처럼 찌릿하고 소름이 돋았어.
그뿐만이 아니었지. 함께 기네스와 와인을 번갈아 마시면서 마치 게임을 하듯이 수다를 떨어 나가다 보니 우리는 마치 쌍둥이처럼 비슷한? 아니, 닮은 점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
너도 나처럼 뮤지컬을 좋아하고 가장 최근에 본 뮤지컬은 ‘마리아 마리아’라는 것.
내일 대학로 작은 극장에서 하는 ‘렌트’ 티켓을 같은 시간대에 예매해 놓았다는 것.
좋아하는 가수는 ‘이적’. 이적의 노래 중에 가장 애정하는 노래는 ‘거짓말’이라는 것도.
심지어 지난 주말에 대학로에서 뮤지컬 ‘오당신(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도 같은 날 보았다는 것까지. 이 정도면 서로의 스토커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 아닌가? 하면서 또 우리는 깔깔대고 웃었지.
너는 어릴 때 호주로 이민을 가서 한국에 친구가 없다고 했어. 나는 사람을 깊게 사귀지 못해서 한국에서 쭉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몇 명 없다고 네게 말했지. 그래서 내가 제안했어. 네가 한국에 있는 동안은 내가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내일 ‘렌트’도 함께 보러 가자고.
내게 스스럼없이 어깨동무를 하며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너는 그날 내게 약속했지.
언젠가 꼭 호주로 오라고. 호주에 오면 내가 좋아할 만한 아주 맛있는 와인을 만드는 농장에 꼭 데려가겠다고.
나는 그 약속이 진짜 현실로 이루어질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해본 적이 없어. 그런데 3년 뒤 나는 너를 만나러 정말로 호주행 비행기에 오르고 있었어. 내가 오직 너를 만나러 호주로 왔다는 사실이 여전히 기적 같아. 운명처럼 딱 맞는 친구를 만나게 되다니 말이야.
그리고 우리의 첫 만남이 우연이 아니고 다 네가 계획했었던 일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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