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혐오' 극복기4: 집단주의적인 왜곡을 넘어

4회 ―3단계 신화모욕①: 미성숙하고 열등하다는 모욕

by 수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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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에 무지한 것은 차라리 괜찮다. 당신은 어떠한가? 신화를 비웃거나, 얕보거나, 무시하거나, 조롱하는 마음은 없는가? 만약 있다면, 그 순간부터 ‘신화혐오/미토헤이트’mytho-hate는 시작된다.

신하비하, 신화혐오, 신화공포— 그 이름이 무엇이든 그 정체는 개찐도찐 정도의 차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제부터 당신의 신화혐오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를 살펴보자.

그 시작은 가벼운 회의주의이다. 이것이 교육과 제도를 통해 고착되면, 왜곡된 집단지향—개인의 자유와 자율을 억누르며 이기주의와 혼동되는 구조—이 신화적인 상상력을 질식시킨다.

결국, 신화는 문화자원이 아닌 미신으로 몰리며, 공동체의 풍요로운 집단표상으로 성숙해갈 계기를 잃어버린다. 이를 넘어서는 길은 신화풍요의 비판적인 계승, 곧 금송아지로의 귀환이다.

신화를 서사의 첫 언어로 우리가 다시인식할 때, 우리는 왜곡된 집단지향을 넘어 개인의 자율과 공동체 결집력을 조화시킬 수 있다.

이번 연재는 '신화혐오'의 피라미드 구조를 5단계로 나누어 살펴본다. 가벼운 회의주의로부터 전면적인 배척 곧 철폐까지, 국내외 사례들을 비교하며, 왜곡된 신화혐오가 어떻게 신화적인 상상력을 억누르는지, 그 메커니즘을 드러내고, 이를 넘어서는 비전을 제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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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계 신화모욕①: 미성숙하고 열등하다는 모욕


근대화의 일부 담론은 신화를 믿는 사람들이 지성적으로 ‘미성숙하고 열등해서 그렇다’라고 규정하고, 이를 전근대적인 사회집단의 특징으로 낙인찍는다. 그러나 이런 시선은 식민주의 특유의 사회진화론적인 문화우월주의, 곧 오리엔탈리즘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번 회차에서는 신화를 미성숙하고 열등한 것으로 모욕하는 신화모욕이 어떻게 왜곡된 집단주의와 맞물려 사회적인 상상력을 억누르는지, 국제사례와 한국사례를 통해 살펴보고, 이를 넘어설 길을 찾아본다.



원시사회들의 신화적인 믿음들은 미성숙한 이성의 증거다Mythic beliefs of primitive societies are evidence of immature reason.

–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사회학 원리』 The Principles of Sociology (1876)


19세기 영국의 사회진화론자 허버트 스펜서(1820~1903)는 ‘신화 속의 믿음은 문명적인 후진적임의 증거, 미성숙한 네이션주의다’Belief in myth is evidence of civilizational backwardness, immature nationalism라고 주장하면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전통 신화를 열등한 문화의 단계로 낙인찍는, 유럽중심의 우월주의를 정당화했다. 이는 합리성을 명분으로 신화의 다층적인 가치를 무시하고, 식민주의적인 서열 체계를 강화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시선이 재현됐다. 1980년대 민중문학논쟁은 한국사회의 급격한 산업화와 정치적인 불안(예: 독재정권, 노동자·농민 소외) 속에서 문학이 사회혁명의 도구로 기능해야 한다는 운동적인 성격을 강조했다.

성민엽의 「민중문학의 논리」나 이재현의 「민중문학운동의 과제」 같은 글 속에서, 민중문학의 핵심적인 심미감성적인 기준으로 '현장성'과 '운동성'을 내세운 일부 이론가들의 신화모욕의 논리를 우리는 볼 수 있다.

민중문학의 합리성과 현실참여를 중시하면서, 샤먼주의같은 집단문화기억들을 '과학적이고 민주적인 문학운동의 장애물' 곧 문학의 정치적인 가성비를 떨어뜨리는 ‘미성숙한 네이션주의’라고 이들은 규정했다.

그리고, 단재 신채호 및 『조선상고사』를 둘러싸고, 이병도(1896~1989), 강만길(1933~2023), 안병직(1936~ ), 백낙청(1938~ ) 등이 각기 다른 관점에서 ‘허구적인 네이션주의’라고 비판한 것도 위와 비슷한 또다른 사례이다. 이들의 비판내용은 제각각이었으나, 그 공동된 바는, 신화모욕이다. 이들에게는 학술비판과 신화혐오를 구별할 자기의식이 빈약했다.

타당한 학술비판은 늘언제나 중요하다. 사료검증과 논리분석에 근거해, 오류 및 과장 그리고 검증되지 않은 (환빠류 같은) 주장은 바로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신화혐오로 연장되고, 그결과 신화를 중시하는 사람들 및 그 문화를 ‘미성숙 또는 열등’으로 비의식적으로 부지불식간에 낙인찍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집단기억의 사회적인 상상력과 문화자산이 정치적인 낙인에 의해 무력화되고, 역사와 정체성의 기반에서 배척된다. 이는 개인의 다원성과 자율을 억압하는 구조로 이어진다. 위의 사례들이 바로 그런 경우들이다.

식민지경험과 근대화과정 및 혁명운동이라는 시대적인 필요들과 맞물리면서, 신화라는 것은 미성숙하고 열등한 것이기 때문에, 신화모욕을 암묵적으로 체화해버린, 오리엔탈리즘의 실재를 이들은 보여줬다.




신화는 공동체를 움직이는 정체성의 원천이다Myth is the source of identity that moves a community.

–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 『상상된 공동체』 Imagined Communities (1983)


앞의 사례들과 달리, 베네딕트 앤더슨(1936~2015)은 위에처럼 말했고,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1918~1990) 역시 신화를 통합과 창조적인 상상력의 자원으로 다시인정했다. 이들의 대조는 신화를 미성숙의 상징으로 격하해 집단상상력을 억압하는 시각과, 통합과 창조의 자원으로 다시평가하는 시각의 차이를 보여준다.

‘미성숙한 신앙은 위험하다’는 경고는 일면 타당하다. 하지만, 그것이 사회적인 상상력과 문화기억을 폐기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신화를 사회적인 상상력의 원천이자 정체성의 설계도로 다시인정할 때, 우리는 금송아지의 귀환—비판과 계승이 결합된 창조적인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렇게 신화를 사회적인 상상력의 원천이자 정체성의 설계도로 인정하는 사회만이 더 풍요로운 문화를 향할 수 있다. 이번 회차에서는 ‘미성숙 및 열등’ 프레임으로 신화를 모욕하는 신화모욕의 어느 모습을 살펴보았다. 다음 회차에서는 신화모욕의 또 다른 프레임인 ‘선동-조작’을 탐구해 보도록 하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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