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형이 글쎄, 우리가 저번에 했던 프로젝트에 대해서 그렇게 욕을 하고 다니던데요······.
나에 대한 욕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것도, 평상시 형님 형님 하며 따랐던 형이 뒤에서 나에 대한 험담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을 때 말이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이미 A에게 나의 속마음을 들켜버렸을지도 모르겠다.
A가 주문한 아그와 바틀을 옆에서 함께 마시며 나는 K형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엊그제 만날 때까지만 해도 나를 싫어하는 듯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와 A가 진행했었던 프로젝트에 대해 필요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을 것이란 생각까지는 전혀 미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아그와 글래스의 관능적인 라인을 흘겨보며 골반을 넘어 허리에 차오를 때까지 에너지 드링크를 천천히 부었다. 들어갈 덴 들어가고 나올 덴 나온, 매혹적인 몸매라 아그와 밤 칵테일이 원하는 수준까지 드링크를 붓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허리까지 수위가 높아진 것이 한눈에 보였다. 글래스의 허리부터 미드까지는 초록빛의 아그와를 흘려보냈다. 마치 초록색 크롭탑 아래 구릿빛 스커트를 입은 여인 같았다. 나와 A는 탐스러운 그녀를 한 입에 맛보았다.
그래? 그 형이 많이 궁금해 하긴 하던데. 뒤에서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 줄은 몰랐네.
K형의 험담에 대한 A의 뒷담화는 바가 마감을 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나마 내가 평상심을 유지하며 A와 대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A가 K형에 대해 안 좋은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진작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 아그와 글래스의 허리까지 수위를 조절하는 것마냥 쉬운 일은 아니다. A의 말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개인적 감정이 들어가 있는 지를 판별해내야만 한다. 그것이 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 내가 적을 만들지 않고 살아온 삶의 방식이었다.
며칠 뒤. 이번에는 예상했던 대로 K형이 찾아왔다. 평소처럼 밝고 우렁찬 인사를 건넨 그는 홀로 2인용 원형 테이블에 앉았다.
A가 말이야. 요새 내가 너랑 사이가 틀어졌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것 같더라고.
양쪽의 얘기를 모두 듣고 나면 나로서는 누구의 말이 진실이지 확신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대화를 함에 있어서도 발화에 담긴 나의 감정은 어느 정도 정제가 된다. 잘못된 판단과 넘겨짚음으로 인해 불필요한 오해나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은 나의 생각이 반영된 결과다. 친한 친구 중 하나는 이런 나를 두고 어디가 더 유리한지 몰라 간을 보기 위해 중립에 서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모르기 때문에 중립을 지키는 것뿐이다. 아직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확신할 수 없기에 판단을 유보하고 중립에 선다.
마키아 벨리는 「군주론」을 통해서 군주가 중립에 서는 행위를 경계했다. 두 대립 국가들 사이에서 중립에 설 경우 이긴 국가로부터는 멸시를, 진 국가로부터는 원망을 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나라는 사람은 좋은 군주가 되기 힘들어 보인다. 적이 없다는 것은 곧 내 편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기에.
가끔 내 편이 없는 것 같다는 사실에 두려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이런 생활 준칙을 쉽게 바꾸지는 못할 것 같다. 대립보다는 대화를, 배척보다는 배려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속에서도 중립국의 지위를 힘겹게 지켜온 스위스처럼 나의 스탠스는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앞으로도 굳건할 것이다.
칵테일 위스퍼
위스키와 드라이 베르무트, 그리고 스위트 베르무트를 같은 비율로 섞어 만드는 칵테일 「위스퍼」는 속삭임, 소문, 밀고를 의미한다. 상대방을 비난하는 말에 크게 맞장구쳐주지도 않는 나임에도 남들에게 말 못 할 이야기들을 사람들이 밀고하는 것을 보면 나는 적어도 주변인들에게 뒤통수를 치지는 않을 사람이라는 인식이 박혀있는 것이 아닐까. 나를 완전히 편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은 적을 완전히 편들어주지도 않는다는 것이니까.
신자들의 죄를 고백받는 신부님처럼 오늘도 나는 찾아온 손님으로부터 말 못 할 비밀을 고백받는다. 그리고 그렇게 밀고된 비밀은 절대 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는다. 마치 성당을 벗어나지 않는 진실한 고해성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