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D Day A Day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윤 Jan 11. 2020

백일제

D-100

 왼쪽 가슴에 파란색 명찰을 차고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학교 안을 거닐던 내가 어느새 시간이 흘러 수능을 고작 100일 앞으로 남겨두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100일이 지났음을 자축했던 입학 백일제 행사를 떠올려보면 수능을 100일 앞둔 오늘의 이 날은 과연 격세지감을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는 하루라고 말할 수 있겠다. 실제로 학교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1학년 후배들을 바라볼 때면 순식간에 흘러가버린 지난날들에 대한 약간의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수능 백일제는 학교에서 행해지는 꽤 전통 있고 유서 깊은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준비해야 할 것은 특별히 없었다. 아무래도 바쁜 고3 수험생들을 배려하기 위한 학교 선생님들과 후배들의 배려일 것이다. 불이 꺼져 어두워진 소극장 의자 위에 앉아 우리는 어두컴컴한 이 곳을 환하게 비추어줄 촛불 하나씩을 손에 들었다. 선생님과 후배의 도움으로 하나둘씩 밝게 피어오르는 촛불들. 들숨날숨에 의해 조금씩 흔들리는 불빛 사이로 보이는 친구들의 얼굴 표정은 꽤나 진지했다. 나 역시도 이러한 경건한 분위기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 선생님의 말씀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정도였다.              


 

 "남은 100일, 처음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가졌던 그 각오와 다짐을 잊지 않고 100일 후에는 모두가 원하는 성적을 거둘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우리는 입으로 촛불을 힘껏 불어 껐고 소극장은 이내 다시 어두워졌다. 차갑게 흐르는 정적. 눈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는 것이라고는 친구들의 숨소리밖에 없는 이곳에서 하나둘씩 큰 목소리로 응원의 말을 외치기 시작했다.               



 "다들 수능 잘 보자!"     

 "조금만 더 참자 이 자식들아-!"     

 "우리 모두 다 수능 대박 나자!"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외침들 속에 우리는 가슴 깊은 곳에서 열렬히 끓어오르는 전우애를 느꼈다.               



 "수능 끝나고 우리 다시 웃는 얼굴로 만나자!"       


        

 누가 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이어지는 응원의 외침들 사이로 나도 말 한마디를 보탰다. 진심이었다. 모두가 잘 되어서 지금의 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술 한 잔의 추억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남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모습으로 100일이 지난 후에도 한일고의 친구들과 새로운 백일, 새로운 일 년, 새로운 미래를 함께 하고 싶었다.            


   

 행사가 끝나니 후배들이 찾아와 저마다 공들여 만든 롤링페이퍼를 전해주었다. 비록 나 혼자 견뎌내는 것도 힘들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후배들과의 시간을 많이 갖지는 못했지만 후배들도 분명 나의 소중한 학창 시절의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소중한 인연이었다. 나는 후배들에게 괜히 더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당당하고 태연한 척 격려의 말을 전했다.     


          

 "이제야 조금 감이 잡히는 것 같다. 나도 남은 기간 더 열심히 공부할 테니까 너희도 열심히 해!"               



 수능 100일 전.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매일매일 줄어드는 칠판 위의 「D- 」 옆 숫자들을 바라보면서도 그 날이 오는 것을 애써 부정해왔다. 내일이면 이제 남은 일 수는 두 자리대로 넘어올 것이고 우리는 마지막 재정비를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다. 솔직히 이제 와서 무언가 달라지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계속되는 불안과 초조 속에서 관성처럼 펜을 들었고 기계처럼 문제를 풀었다. 집중은 되지 않았지만 자리는 항상 지키고 앉아있었다. 남은 시간들이 내가 성장하기에는 너무나 짧았기에 현상유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나 자신과 일종의 타협을 본 것이다. 이제 내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한 줄기의 빛,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희망, 하늘이 내려준 기적밖에 없었다. 그만큼 100일이라는 숫자는 나에게 있어서 매우 아쉽고 절망적인 숫자였다.               



나는 공중전화 박스 안으로 들어가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수능 100일 전임을 알고 계시는 부모님께서는 나에게 격려의 말과 함께 응원의 메시지를 전해주셨다. 잘하자.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그것밖에 없었다. 나는 100일 후를 기대하시라는 허풍 섞인 말과 함께 부모님에게 인사를 고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나의 지난날들처럼 밤하늘은 아름다운 별들로 빼곡히 박혀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모의 수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