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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윤 Jan 12. 2020

떨리는 오늘

D-1

 수능 전 날의 기분은 어떠할까 하고 상상해본 적이 있다. 폭풍전야를 의식하듯 교실은 무섭도록 조용하고 친구들은 되도록이면 험한 말을 삼갔다. 미신을 믿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시험에 영향이 있을 수 있는 부정적인 단어들은 다른 긍정적인 단어로 교체했다. 예를 들면 펜이 바닥에 '떨어졌다'가 아니라 '붙였다'라고 표현하는 식으로 말이다. 주변 환경에 예민한 친구들은 서로를 배려하며 평소보다 더욱 조심스레 행동했다.               



 눈을 뜨자마자 느껴지는 과도한 긴장감은 친구들과 함께하며 조금이나마 떨어졌다. 지금까지의 나의 삶을 평가받는다 해도 과언이 아닐 D-Day를 앞두고 나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느라 바빴다. 내일은 나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날. 기적과 같은 행운이 나를 도와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런 믿음이 없다면 지금의 중압감을 버텨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책상 앞에 앉았지만 이제 와서 공부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문득 지금까지 해왔던 공부보다는 실전을 대비하여 모의고사를 연습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전에 구매하여 풀었던 사설 봉투 모의고사 중 하나를 꺼내 아침부터 실제 시험시간에 맞춰 풀었다. 수도 없이 풀어 본 모의고사이기에 긴장감 속에서도 페이스를 되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금의 이 모의고사가 실제 수능이라면 어땠을지를 상상하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결과는 꽤 나쁘지 않았다. 걱정했던 영어 성적도 만족스러웠고 실수로 틀린 수학 문제 하나를 제외하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내일은 이보다 더 좋은 결과를 받아야 하겠지만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계속 신경 쓰다 보면 괜히 더 걱정만 늘어날 뿐이니까.          


     

 사설 봉투 모의고사를 모두 풀고 나니 어느새 늦은 오후가 되어 있었다. 남은 시간도 별로 없고 전 날에 뭘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나는 고민 끝에 그나마 벼락치기가 조금이라도 가능한 제2 외국어 아랍어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공부한 흔적이 보이는 아랍어 필기 노트. 수능 전 날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며 쉬엄쉬엄 공부하기에 나쁘지 않은 선택지일 것이다.       


        

 저녁 식사를 하고 어두워진 하늘을 보며 지금의 이 기분을 잠시 동안 음미했다. 나에게도 수능이 찾아오긴 하는구나. 새삼 실감이 됨과 동시에 어딘가 우울감이 찾아왔다. 내일이 되면 지금 이 곳에서 누군가는 쾌재를 부를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울음을 터뜨릴 것이다. 제발 나는 전자에 해당되는 사람이기를 기도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행운의 여신은 분명히 나의 손을 들어주실 것이다.               



 야간 자율학습은 수험생들의 수능 전 수면시간을 보장해주기 위하여 평소보다 3시간이나 이른 9시에 끝이 났다. 자습시간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 여기저기서 수능 대박을 기원하는 기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대세에 편승하여 친구들과 소리를 질렀다. 친구들 간의 응원과 격려가 외로운 이 싸움의 고난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듯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생각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기숙사에 돌아가자마자 나는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수능 시험장에 가져갈 준비물을 쌌다. 쉬는 시간에 볼 핵심 개념 노트들과 필기도구, 그리고 습관성 두통을 잠재워줄 타이레놀을 챙겼다. 빠짐없이 챙겼음에도 어딘가 부족한 기분이 들었지만 혹시나 안 챙긴 것이 있다면 그런 것은 다음 날 아침에 챙기기로 했다. 침대 위에 올라가 누운 나는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잠에 거의 빠져들었을 무렵 가까운 곳에서 기숙사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간 연등을 하고 돌아온 친구였다. 친구가 돌아와 취침에 들어갈 준비를 했고 나는 그 어수선한 소리에 잠이 달아나 버렸다. 잠잠했던 긴장감이 함께 엄습했다. 빨리 잠에 들지 않으면 다음 날 수능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함께 하니 오히려 더욱더 잠에 들지 못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눈은 더 말똥말똥해졌다.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여봐도 편한 자세가 나오지 않았다. 점점 더 불면증의 늪에 빠져갈 뿐이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어느새 시간이 자정에 다다랐다. 나는 끝내 취침을 포기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기숙사 입구 로비로 나가니 나처럼 잠에 들지 못한 친구들이 여럿 모여있었다. 다들 긴장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진심으로 달래주었다. 하나 둘 이제 다시 잠을 청해보겠다며 숙소로 돌아갔다. 나는 숙소에 돌아가기 전 공중전화 앞으로 가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잠이 안 와서 한번 전화해봤어요."               



 아버지는 불안감에 휩싸인 나를 달래주러 노력하셨다. 많이 신경 쓴 격려의 말들이 실제로 내 불안감을 줄여주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부모님 또한 나만큼 걱정하고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아버지 덕에 괜찮아졌다는 거짓말을 했다. 나는 아버지와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침대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한 시간은 새벽 두 시. 불안해서 그 이상은 시간을 보지 않았으니 실제 언제 잠에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면 시간이 매우 적었음은 분명하다. 나의 첫 번째 수능은 그렇게 여러 안 좋은 징조들과 함께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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