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 작 하는 그녀 Dec 31. 2020

두 남자, 그들이 애틋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창업가적 사고로 바라본 영화 '천문'

영화 '천문'을 보고 세종대왕을 신사업 기획 리더로, 장영실을 신사업 추진 실무자로 해석하는 것은 나의 커리어에 기인한다. 대기업에서 전략기획팀, 브랜드전략팀, 글로벌사업팀 등의 커리어를 거쳐오면서 새로운 영역을 발굴하고 추진해가는 일을 주로 맡아왔다. 이러한 직업적 시선이 투영된 영화 '천문'에 대한 감상을 쓰고자 한다.


최근 스타트업 붐으로 인해 사회 전반적으로 창업을 반기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기업에서의 신사업 추진이든, 스타트업 창업이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가는 당사자들은 힘들고 기나긴 터널을 통과하며 고통의 시간을 겪게 된다. 세종대왕과 장영실은 신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한 동반자로서 이 터널의 여정을 함께했다.

 

영화 '천문'은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루며, 신분을 뛰어넘은 세종의 인재 등용 방식, 장영실의 뛰어난 과학적 능력, 조선의 하늘과 시간을 만들기 위한 이들의 노력과 열정을 휴머니즘적으로 녹여냈다. 이 영화에 대한 일부 비판적인 의견도 있다. '너무 서정적 관계에 집중한 나머지, 둘의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몇몇 장면은 너무 오글거린다', '이야기의 알맹이가 부족하다', '기대했던 역사 영화가 아니네' 등이다.


세종과 장영실, '창업 동반자'


그러나, 나는 이 영화의 주인공인 세종과 장영실을 '창업 동반자'의 관계로 바라봤다.


신사업의 유형은 추진 주체에 따라 대기업에서의 신사업 도입, 스타트업 창업, 크게 2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둘 다 enterpreneur(창업가)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터전과 주요 장애요인은 다르다.


대기업에서의 신사업 도입은 기존 자본과 인프라를 쉽게 활용할 수 있지만, 내부 이해관계자들과의 갈등과 같은 내부 설득이 주된 허들이다. 스타트업은 사업 아이템 자체에 대하여 외부 투자자 대상으로 설득시켜 자본을 획득하고 인적 자원 등 필요한 자원과 인프라를 모두 제로 베이스에서 마련해야 한다.


영화 속 세종의 '천문학 연구'와 '훈민정음 창제'라는 신사업은 전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는 안여(임금님이 타는 가마) 사고를 중심 사건으로 설정해, 내부 이해관계자들의 대립 구조(세종, 장영실 vs 명나라, 사대부)를 바탕으로 긴장감 있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세종이 어떻게 이해관계를 다루고, 오늘날에도 길이 남은 신사업을 추진해가는지, 그 안에서 장영실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엿볼 수 있다.  


세종과 장영실의 만남은 신사업을 본격화하는 기폭제가 된다. 세종에게 장영실은 곧 성공적 사업을 위한 추진동력이자 중장기 사업전략을 깊이 공감하는 벗이 된다. 세종은 천문학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던 중 관노 신분인 장영실을 만나게 되고  그의 뛰어난 손재주와 과학적 재능을 발견하고 '조선만의 독자적인 천문기기 발명'이라는 신사업 추진 실무가로 합류시킨다. 관노 신분을 해방시켜주고 장영실에게 벼슬을 주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하면서.


이때부터 신분 체계로 인한 기존 세력들의 질투와 반대가 시작되었다. 물시계를 만들 때, 적기를 만들 때 모두 명나라 사대부의 반발이 잇따랐다.


반대할 만한 이유, 있었다.


기업도 신사업 도입 초기에는 내부의 반발이 크던 작던 생기기 마련이다. 대부분 기업이 신사업을 추진하는 배경은 기존에 캐시카우(cash cow) 역할을 했던 핵심 사업라인의 성장률이 둔화되거나, 외부 환경 변화로 인해 사업 라인을 추가하여 포트폴리오를 다변화시키기 위한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사업 부서는 도전을 받게 된다고 느낀다.


핵심자리를 차지하고 회사에서 인정받던 부서가 신사업 추진으로 인해 경영진의 관심을 덜 받게 되거나, 후순위로 밀려나는 느낌을 받게 된다면? 회사 수익의 상당 부분을 벌어다주던 기존 사업의 수익 비중이 감소하고, 신규 사업의 수익 비중이 높아진다면? 기득권이 약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 내부의 심리적 반발은 시작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물시계, 해시계 등 천문관측 기기를 장영실이 발명했을 때,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기 위한 밑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사대부들은 명나라의 침범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표하며 반대하는 상소까지 올린다. 이는 사대부들이 명나라의 문화를 섬기는 것을 곧 그들의 권력으로 생각했는데, 그 문화는 명나라의 시간 체제와 한자받들며 사용하는 것이었다. 명나라가 조선을 침범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라 사대부들이 반대하지만, 이는 그들의 표면적인 이유이며, 내면적으로는 쉬운 한글이 보편화될 경우 백성들의 의식이 높아져 본인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를 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세종이 한글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영의정과 세종이 독대하는 장면에서 다음 영의정의 발언은 이러한 의식을 대변하고 있다.

 “글은 사대부의 밥이옵니다.
   밥은 곧 권력이옵니다.

   권력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준다면
   조선의 모든 사대부들은 전하를 등질 것이옵니다.
   
   사대부들의 지지 없이 전하께서 꿈꾸는 나라를
   어찌 세울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영의정은 세종에게 한글 창제 프로젝트를 그만두면, 안여 사건 범인으로 몰린 장영실을 살리도록 돕겠다는 제안을 한다.

새로운 글자를 만들려고 시도하는 자체가 당시에는 상당히 위험하고 사대부들의 반대가 거센 일이었다. 영화 후반부에는 세종이 사대부들과의 첨예한 대립 속에 장영실을 살리기 위해 글자 만드는 것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열린 결말에 숨긴 반전


영화는 후반부에 여러 번의 반전을 심어놓는데, 안여 사건이 왕권에 도전하고 명나라에 편승하는 간신을 찾아내기 위한 세종의 계략임이 보이고, 세종은 이 사실을 장영실에게 은밀히 말한다. 세종은 그를 살리고 싶어 하고 장영실은 계속 세종을 따르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재판 당일 장영실은 본인이 범인이라 말하며 한글 창제의 길이 멈지않도록 한다.

“이제 내게 더 이상 주군은 없소.”


눈 앞에 주군은 없지만 그들이 꿈꾸는 뜻과 나라는 계속될 것이라는 장영실의 다짐이 반어법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자막 또 다른 반전을 암시한다.

“1442년 장영실은 곤장 80도의 형별을 받는다.
  그 후 그의 생사에 대한 기록은 없다.

  2년 뒤 조선 최초의 천문 역서 칠정산이
  편찬되었다.

 1446년 훈민정음이 반포되었다.”


세종이 일부러 장영실을 숨겨 천문학 연구와 한글 창제의 길을 지속했음을 상상해볼 수 있다.



열매는 저절로 영글리 없다


벤처를 시작하는 창업가도, 기업에서 새로운 사업 분야를 개척하는 경영진도, 내부의 갈등외부의 도전은 피할 수 없는 장애 요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비전을 함께 꿈꾸고 그 비전을 하나하나 현실화시켜줄 수 있는 동료가 필히 있어야 한다. 그 동료는 단지 CEO의 권력에 편승하여 따르는 척하는 '간신(奸臣)'이 아니라, 조직이 나아가야 할 바에 대해 폭넓은 시각에서 이해하고 CEO의 뜻을 진심으로 공감하고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충신(忠臣)'이어야 한다.


그 뜻 또한 경영진의 이익을 위한 길이 아니라 조직 전체, 사회 전체에 이로운 ‘대의’ 여야 그 대의를 품은 CEO와 충신 같은 동료가 만나 의미 있는 혁신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세종과 장영실이 '조선의 것을 만들어 조선을 이롭게 하겠다'는 뜻을 함께 한 것처럼.

장영실이 그 지난한 과정을 오롯이 받쳐낸 것처럼.


영화 천문을 보며 오늘도 힘든 길을 견뎌내는, 흔들리며 꽃을 피워 낼 창업가들을 응원한다.

 




작가의 이전글 12월 30일, 뒤통수를 맞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