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독립적인 여자 강수하 글, 그림
나는 월급을 받는 노동자이고 동시에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강성 노조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요즘은 어디서나 '노동자의 권리', 혹은 '일자리 창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듯하다.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대통령까지, 더 나아가서는 미국에서도 이런 물결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을 정도니까. 노동자의 인권이 상승하고 고용과 권리가 보장되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라고 어디서나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오늘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먼저 노동자의 정의부터 다시 내려보자. 개인적인 생각으로, 요즘 노동 인권 문제에서 이야기하는 '노동자'는 '노동하는 사람'과는 조금 다른 의미이다. 노동자의 권리 문제는 고용주가 노동자를 천대하면서 시작된다. 따라서, 이 시대가 말하는 노동자는 '고용주에게 고용된 자'이다. 자주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은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기서 '노동자'란, '노예'의 현대적인 단어인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정식 노예'가 되지 못해 안달이라는 것이다. 거대 자본의 노예가 되는 것 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은 늙은 세대로 갈수록 더 심화된다. 기성세대들은 말한다. 사람은 자기 기술이 있어야 된다고. 지당한 말이다.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독자적인 자기 기술이 있어야 된다. 하지만 정작 이 말을 하는 기성세대들은 독자적인 '기술'이 뭔지 잘 모른다. 대기업에 들어가서 배우는 게 '기술'일까? 엑셀 잘하고 시키는 일 잘 하는 게 '기술'일까? 그래서 언젠가 그 회사에서 쫓겨났을 때, 누가 그 '기술'을 필요로 할까? 그런데도 내 자식은 취직해서 착실히 회사 다니기만을 바라는 꼴이라니. 젊은 세대도 마찬가지다. 나를 포함하여 시키는 대로 공부만 하고 입시를 거친 세대는 스스로 뭘 할 줄 모른다. 남이 시키는 일이 아니면 먹고살기 막막한 것이다. '노예'가 되는 방법 이외에는 살아갈 줄 모르는 것이다.
나는 사회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귀동냥으로 들어서 알고는 있다. 거대 자본이 사람들의 자립 능력을 상실토록 하였으며, 이제는 거대 자본에게 바치는 노동의 대가를 받아서 거대 자본에서 제공하는 재화를 소비하며 살 수밖에 없다고. 그것이 가장 쉽게 사는 길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 거대 자본에게 당당히 "내 일자리를 내놓아라."라고 하는 것이 조금 부끄럽다. 그것은 마치 맡기지도 않은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거대 자본에 편승하는 것이 최고의 길이라고, 어서 빨리 더 노력해서 더 좋은 노예 자리를 차지하라고 다그치는 사회가 부끄럽다. 그보다는 그것으로부터 도망쳐서 나 스스로를 바로 세울 수 있는 방법에 모두가 관심을 갖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고용주가 노동자를 천대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이고 사회가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노예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게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아주 독립적인 여자 강수하>
- 냉정한 분노로 나를 지키는 이야기
“강수하는 강한 사람도 아닌 주제에,
너무나 꿋꿋하다.
강수하가 너무 독립적이지 않아도 되도록,
함께 옆에 서서 가고 싶다.”
- 서늘한여름밤(《나에게 다정한 하루》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