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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거 Jang Oct 02. 2015

13. 복면 사원



1.
어느 회사의 면접을 본 일이 있다.
나는 면접 당일 늦잠을 자고 말았다. 급하게 콜택시를 타고 한 시간 반을 달려 겨우 면접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헐레벌떡 주위를 둘러보니 6~7명씩 그룹별로 앉아 있었다. 내 자리에 앉자 사람들이 힐끗 쳐다보더니 곧 면접 노트에 눈을 파묻었다. 면접은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하루 종일 진행되었다. 이 긴 시간 동안 오롯이 그룹별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그룹 면접이었다.  

우리 7명은 간단히 통성명을 하고 토의를 시작했다. 해결해야 할 사회 문제를 정하고 그것을 비즈니스 관점으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도출하는 것이었다. 다들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모여 자유롭게 논의하다 보면 그리 어렵지는 않겠다 싶었다.

문제는 면접관들이 우리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중간고사 시험 감독하는 선생님처럼 면접관들은 느릿느릿 우리 주위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맞은편 여자애의 얘기를 유심히 듣던 중,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면접관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조급해졌다.
'면접관이 조용히 있는 내 모습을 보고 평가를 매기면 어떡하지?'
면접관이 보는 그 순간 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최소한

"맞습니다. 그건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라는 추임새라도 내가 얼마나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협력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인재인지를 어필해야 했다. 면접관이 노트를 끄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고 상대방의 발언을 자르고 내 멘트를 구겨 넣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눈치를 요리조리 살피며 언제 끼어들고 어떻게 주도할지 고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경우는 4P 전략을 통해 분석하는 방법론이 더 적합해 보여요"
"타겟 고객을 명확히 하고 우리 서비스의 차별화와 핵심 역량을 규명하는 것도 필요하죠."
"이렇게 그림으로 한 번 정리해서 보면 훨씬 심플할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방식은 이미 유사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나를 포함한 우리들은 면접관 앞에서 어떻게든 멋진 말로 나를 홍보하려고 노력했다. 진정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기보단 내 의견이 관철되어 더 많은 발언권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 종일 카메라 앞의 배우처럼 '외향적으로 보이는 연기'를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훌륭해지려면 대담해야 하고, 행복해지려면 사교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곳을 외향적인 사람들의 나라라고 여긴다. (중략)
이상적인 자아란, 사교적이고 지배적이며 스포트라이트에 익숙한 외향적인 존재일 거라고 생각하는 만연한 믿음이 있다.
(콰이어트, 수전 케인)


장장 8시간 동안 계속된 토론면접에서 결국 나는 탈락하고 말았다.
'아침에 늦잠을 자서 그럴 거야.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했어.'
이렇게 핑계를 대보았지만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불합격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연기에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2.
내향성의 가치를 설파한 '콰이어트'의 저자 수전 케인에 의하면, 현대 사회는 '인격의 문화'에서 '성격의 문화'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옛날 시골 시대에서는 이웃끼리 모두가 서로 잘 알고 친근했다. 그 작은 사회에서는 진지하고 명예로운 '인격'이 이상적인 자아로 여겨졌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거대한 도시 문명에서는 온통 낯선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성격'이 가장 큰 권력이 된 것이다. 이러한 성격의 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모두가 점점 세일즈맨이자 연기자가 되어갔다고 한다.

콰이어트, 수전 케인


내향성의 가치를 설파하는 수전 케인 (출처 : TED 2012)


당장 회사에서부터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인재상을 선호한다.
'인생에서 깊은 사색을 통해 깨달음을 얻거나, 고독 속에서 자신을 마주한 경험을 서술해 보세요.'
따위와 같은 질문은 입사 전형에서 묻지 않는다.
'우리 회사는 대인관계가 넓진 않지만 깊이가 있는, 말수가 많진 않지만 경청할 줄 아는, 평소엔 신중하지만 필요할 땐 나서는 그런 인재상을 원합니다.'
라고 말하는 회사는 단 한 곳도 없었다.

회사에서 원하는 것은 외향, 적극, 주도, 긍정, 열정... 이런 단어들만 조합된 마치 '캡틴 플래닛'과 같은 회사 인격체였다.

캡틴 플래닛 : 땅, 불, 바람, 물, 마음 다섯 가지 힘이 하나로 모아 탄생한 지구환경 지킴이 히어로.

모두가 야생에서 고군분투하며 전 세계를 휘저으며 리더십을 발휘한 경험만을 듣기 원했다.

실제로 입사하면 대부분은 대기업이라는 온실 속에서 정해진 룰을 벗어나지 못한 채 일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캡틴 플래닛


그러나 나는 어쨌든 외향성 이상주의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내가 찾은 방법은 외향성 복면을 쓰는 것이었다.
나는 캡틴 플래닛은 못 되더라도, 복면사원은 될 수 있었다. 복면을 쓰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지만, 복면을 쓰면 수퍼 히어로처럼 뭐든지 할 수 있는 존재로 변신했다.

그 후 입사 면접 때의 나는 '리더십 있고 운동도 잘하며 못하는 게 없는 열정적인 인재'로 변신했다. 사실과 멀었지만 복면 뒤에서는 천연덕스럽게 속일 수 있었다.

그 후 전략기획 파트에서는 외향적인 사람을 선호한다는 말을 들었다. 상무님을 보위하며 여러 부서들과 조율하고 대외협력을 위해 각 부서별 회식도 앞장서서 다니며 친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또 다시 '술도 잘 먹고 대인관계도 좋은 신입'으로 변신했다.

몇 년 뒤 해외 영업 부서로 옮길 때도 마찬가지였다. 담당 부장님이,
"우린 외향적이고 적극적으로 고객을 만나고 해외 지법인과도 잘 지내고 영어도 잘하는 사람을 원해. 그런 거 잘 할 수 있겠어?"
라고 물었을 때, 속으로는 한없이 위축되었지만 나는 또 다시 복면을 꺼내 들었다.

'네, 저 잘합니다. 전부 다 잘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활달했던 때를 떠올렸다.
초등학교 5학년 반장을 했을 때? 막 제대하고 인턴을 알아볼 때? 어쩌면 엄마 뱃속에서 갓 태어났을 때였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울었을 테니까.
그렇게 나는 내가 외향적일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자꾸 증거를 찾고 있었다. 증거가 없다면 근거라도 남겨야 했다.
무슨 모임에 참여하고 멘토링도 신청하고 여기저기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안부를 묻고 약속을 잡고 주말 점심은 종로에서 저녁은 강남에서 동분서주하며 나의 활달함을 스스로에게 입증하고자 했다.   

어느 날 평소 관심 있던 포럼에 간 일이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서로 자유롭게 소개하는 네트워킹 시간이었는데,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것이었다. 자신감 있는 눈빛에 자랑스레 명함을 주고받는 사람들 틈에서 갑자기 소외감을 느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에너지가 고갈된 나는 어느새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미국의 사회비평 작가인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직접 구직 활동을 체험한 적이 있었다.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어떤 구직자의 얘기를 듣게 되었다.  
"네트워킹이 너무 힘듭니다. 나는 조용하고 내성적이거든요. 네트워킹이 마치 사기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 게임은 본래가 그런 식이죠."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사회성을 이면의 목적에 맞게 굴절시키므로 '사기'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중략)
네트워킹에서는 매춘과 마찬가지로 매혹될 시간이 없다. 네트워킹 작업을 꾀하는 사람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더 귀중한 정보나 만남을 찾아 상대의 어깨 너머로 계속 시선을 돌린다.
(희망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



3.
여느 히어로물의 패턴이 그렇듯, 언제부터인가 나는 완벽한 복면사원으로 변신하는 것에 점점 피로를 느꼈다. 그 히어로가 구하고자 하는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일진대, 스스로 점점 고갈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회사에서는 회사의 정체성으로, 집에서는 개인의 정체성으로 완벽하게 분리할 줄 알아야 한다고. 다양한 사회생활에 맞는 프로페셔널한 가면을 쓰는 것이 성공하는 인재의 핵심 자질이라고.
그러나 나의 복면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졌고 나는 갈수록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완벽히 인격을 분리함으로써 회사에서는 인정받겠지만, 과연 나 자신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을까.


훗날 나는 다짐했다.
외향성 이상 사회의 완벽한 히어로가 되기보다는, 불안전한 세상의 평범한 나로 돌아오기로.

나중에는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다.

그 때 그 복면은 결국 벗기 위해 썼던 것이었음을.



감정노동, 엘리 러셀 혹실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브로드웨이에서 '관재인 The Committee'이라는 즉흥극이 공연된 적이 있다.
이 연극의 한 대목에서, 어느 남자가 하품을 하고 마치 잠자리에 들 준비가 된 것처럼 팔을 쭉 뻗으면서 무대 중앙에 등장한다. 그 남자는 모자를 벗어서 천천히 상상의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고 나서 가발을 벗는다. 천천히 안경을 벗고 안경에 눌린 콧날을 마사지한다. 그러고 나면 코를 떼어낸다. 그리고 이를 뺀다. 마침내 미소를 풀어버리고 누워서 잠이 든다.
이 남자는 마침내 '자신'이 된 것이다.
(감정노동, 앨리 러셀 혹실드)






<참고서적>

콰이어트, 수전 케인, 김우열 역, 알에이치코리아, 2012년

희망의 배신, 바버르 에런라이크, 전미영 역, 부키, 2012년

감정노동, 엘리 러셀 혹실드, 이가람 역, 이매진,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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