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티거 Jang Sep 25. 2015

12. 인간의 시간, 회사의 시간



1.

독일 회사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이 있었다. 한국에 살던 습관대로 그는 성실하게 일했다. 가장 일찍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고 주말도 반납하며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독일인 상사가 그를 불러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늦게까지 일하면 우리 회사의 철학에 위배됩니다.

개인의 삶과 일의 균형을 중시하는 다른 직원들에게까지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어요.

정말 그렇게 일이 많다면 추가 인원을 고용하는 게 맞아요."


최근 국내 대기업에 근무하는 한 친구를 만났다. 프로젝트 때문에 3개월 내내 야근과 주말 출근으로 회사 앞에서 숙식하다시피 하며 살다가, 모처럼 일찍 퇴근한 날이 있었다고 한다.

다음 날 상사가 그를 불러 말했다.

"요즘 일이 없나봐?

지금 다른 팀에서 하는 일이 있는데 거기 사람이 모자라니 가서 좀 도와줘."

알고 보니 최근 야근이 없는 사람들만 그 일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당시 담당자 말로는, 그 일은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독일과 한국의 시차만큼 기업이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다.  

독일 기업은 일보다 인간 중심으로 시간을 바라본다. 일이 많아질수록 그에 필요한 사람을 더 뽑아 시간을 채우는 것.

반면 한국 기업은 인간보다 일 중심으로 시간을 바라본다. 일이 많아질수록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시간을 일하게 하는 것.

조직운영 비용 관점에서 보면, 표면상으로는 독일보다 한국이 훨씬 더 효율적일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독일의 절반에 불과하다. GDP 역시 절반 수준이다. 두 배 더 일하면서 버는 것은 절반 수준이니, 약 4배의 생산성 차이가 발생하는 셈이다.


그렇게 매출 증대를 강조하지만 정작 매출은 증대되지 않는 역설. 갈수록 직원들은 더 피곤해지고 그럴수록 서로 더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오히려 이런 시간들을 당연하게 살아내고 있는 우리는 어느새 회사의 시간 안에 갇혀버린 것이다.



2.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 인간과 회사의 시간은 서로 다르다.


원래 인간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살았다.

아주 오래전 인간의 시간의 기준은 자연이었다.

사람들은 해가 지면 자고 암탉이 울면 일어났다. 농업 중심의 삶에서 사람들은 '천체의 변화, 우기와 건기, 지구의 공전, 동식물들의 성장 리듬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시간에 녹아들며, 시간의 압박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던 시대였다.

템포 템포, 칼 하인츠 A. 가이슬러

따라서 사람들은 지금처럼 오래 일하지 않았다. 파푸아 뉴기니 사람들은 이틀 연속 일하지 않았다. 호주의 원주민들도 하루 4시간 이상 일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집트인들은 일 년에 70일 정도만 일했다. 고대 아네테 인들은 연 50회 이상 축제를 즐기고, 중세 영국에서는 연간 3분의 1 정도가 여가 시간이었다고 한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노명우 풀어씀



그러나 산업화 이후 인간에게 회사의 시간이 도입되었다. 인간은 갑자기 '엄격한 시간 관리' 속에서 살게 되었다. 연간 52주, 주 5~6일, 하루 8~16시간씩 규칙적인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몇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시간의 압박 없이' 살던 인간은 최근 200년 사이 갑작스런 '시간의 통제' 속에 갇히게 된 셈이다. 우리가 매일 아침 억지로 일어나 꾸역꾸역 출근하고, 출근하자마자 매 순간 퇴근 시간만을 기다리는 이유이다.


기계화로서의 산업화는 인간의 시간을 기계의 시간에 동화시키려 한다. 산업화의 명령은 기계의 박자에 맞게 인간을 개조하라는 시간경제학적 명령이다. (중략)
기계의 작업 과정과 유사해진 인간의 삶은 오직 쉬는 시간, 일이 없는 막간, 일의 피로에서 회복하여 다시 최상의 컨디션으로 일에 몸 바치기 위해 필요한 시간밖에 알지 못한다.
(시간의 향기, 한병철)


기계의 시간, 즉 회사의 시간이라는 프레임에서는 인간의 모든 활동은 회사를 위해 존재하게 되었다.

휴가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해 노동력을 재충전하는 시간으로 규정되고, 소비와 여가 시간은 회사의 매출 성장을 위한 부속물로 전락한다. 노는 시간 역시 '자유'가 아닌 '실업'이란 이름으로, 마치 회사에서 일을 하지 않으면 루저인 것처럼 취급된다.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제현주

그렇게 우리는 주말 2일을 위해 평일 5일을 희생하며 평생을 살아간다. 인생의 30%를 위해 70%를 회사에 바치며 살아가는 기형적인 구조인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은 10%를 위해 90%에 저당 잡혀 있지만.)



3.

'임원급 회의가 끝나면 온갖 이슈와 액션 아이템이 생겨난다. 이것들은 개발 상황과 제약 조건에 대한 고려 없이 무조건 해야만 한다. SW 설계 같은 건 없다. 처음의 계획과 지금은 완전 다른 어플리케이션이 되었다. 코드는 걸레가 되어 속도는 점점 느려진다. 과제 내내 모든 게 긴급이다. 이번 달만 고생하자. 상사의 이 말을 들으며 그렇게 일 년이 지나간다.

사람들은 모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사무실엔 웃음이 사라진지 오래다. 타부서의 업무 협조는 어지간하면 무시한다. 다들 자기 일 처리하기도 급급하다.

그 와중에 나는 또 다른 새로운 과제에 투입되었다. 오늘도 나는 그저 무능한 개발자일 뿐이다.'


어느 대기업 개발자의 하소연이다. 게시판에는 수많은 댓글들이 마치 내 얘기 같다며 힘내라며 함께 울분을 토로했다.

그러나 이런 순간도 잠시, 댓글을 쓰던 우리들은 곧바로 상사의 부름에 허둥지둥 달려가야 한다.

'다들 자기 일 처리하기도 급급한' 우리들에게 후배의 고민을 들어주거나 청소 아주머니께 인사하거나 또는 퇴사하는 동료와 차 한잔 마실 시간조차도 사치가 된다.


1970년 프린스턴 대학에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길거리에 아픈 사람처럼 연기하는 배우가 있었고, 학생들은 그곳을 지나가야 했다. 이 때 모임에 늦었다고 생각한 학생들과 아직 여유가 있다고 생각한 학생들의 반응을 보았다. 결과는 전자보다 후자에서 더 많이 아픈 사람을 챙겨 주었다. 서두르던 사람들은 너무 빨리 이동하느라 주위의 아픈 사람을 발견하지도 못했고, 설령 발견했다 하더라도 우선순위에 쫓겨 가버렸다.

가치란 무엇인가, 짐 월리스


선한 사마리아인 실험 (출처 : YTN)


속도가 빨라지면 윤리도 사치가 된다.

회사의 속도는 점점 가속화된다.

특히 우리나라의 시간은 유독 더 빠르다. 전쟁의 폐허에서 고도의 압축성장으로 달려온 우리는 '30년의 생물학적 시간에 300년의 서사적 시간을 살아야' 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 강준만

따라서 국가와 회사의 시간이 압축되고 덩달아 개인의 시간 역시 빠르게 압축되었다.

모든 메일에 [긴급]이 붙어 있다. 아무도 [긴급] 메일에 긴급하게 답변하지 않는다. 모든 게 다 긴급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긴급하지 않게 된다. [긴급]의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보고 기한이 그렇기 때문에, 늦게 보고하면 혼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상사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이것저것 무수히 많은 버전들의 물량 공세로 수없이 리뷰하고 수정하고 검토를 반복한다. 무언가 늘 분주하고 바쁜 것 같지만 결과는 혼나거나 덜 혼날 뿐이다.

속도만 중시하면 위기를 회피하게 된다. 잘하기보다는 덜 혼나는 쪽으로, 겉은 그럴싸하지만 속은 실속 없는 사업들로 모두가 속도의 노예가 된다.


코끼리와 쥐의 수명은 다르다. 코끼리는 약 60년을 살고 쥐는 약 3년뿐이라고 한다. 그런데 코끼리와 쥐 모두 평생의 심박수는 15억 회 정도로 비슷하다. 즉 코끼리는 분당 50회의 심박수로 느긋하게 사는 반면, 쥐는 분당 1,000회 정도로 바쁘게 사는 것이다. 같은 총량이 주어졌지만 심박수 차이로 인해 쥐의 시간은 급격히 압축되어 버린 것이다.


시간의 압축은 결국 생명의 압축이다.

생명이 줄어드는 것이다.  

어쩌면 코끼리로 태어난 인간은 회사의 시간에 압축당한 쥐로 변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출처 : 인터스텔라





<참고서적>

템포 템포, 칼 하인츠 A. 가이슬러, 신혜원 역, 지식의 숲, 2009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노명우 풀어씀, 사계절, 2008년

시간의 향기, 한병철, 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2013년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제현주, 어크로스, 2014년

가치란 무엇인가, 짐 월리스, 박세혁 역, IVP, 2011년





<퇴사의 추억> 단행본이 출간되었습니다. 

브런치에는 전체 내용의 일부만 공개되어 있습니다. 

방금 읽으신 내용이 마음에 드셨다면, 전체 내용을 위한 단행본 구입을 부탁드립니다^^


(좋은 글 한 편을 위해서 작가에게는 최소 10시간 이상의 연구와 습작, 퇴고 작업이 필요합니다. 

양질의 콘텐츠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는 생태계를 위해 함께해 주세요. 

독자들에게 더 좋은 글과 작품으로 보답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http://www.yes24.com/24/goods/32106290?scode=032&OzSrank=1


매거진의 이전글 11. '칼퇴' 없는 세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