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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거 Jang Sep 23. 2015

11. '칼퇴' 없는 세상



1.

복도 쪽이 술렁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쏠렸다. 검은 정장 무리들이 우르르 지나가고 있었다. 새로 온 부사장님이 사무실을 구경하러 온 것이다. 30분 뒤 전체 공지 메일이 날아왔다.


'부사장님 특별지시.

각자 자리가 너무 지저분하니 지금 즉시 정리 정돈할 것.

책상 위 컴퓨터와 키보드를 제외한

노트, 서적, 필기구, 달력, 화분, 머그컵, 기타 개인용품 일체 서랍에 넣을 것.

매일 검사할 예정.'


메일은 영문으로도 왔다. 다음 날 외국인 동료들과 같이 밥을 먹게 되었다. 한 인도 출신 과장은 한국 기업에서 이런 일을 숱하게 겪어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괜히 부끄러워졌다.


에릭이 처음 구글에 들어왔을 때, 그는 설비 책임자인 조지 샐러에게 실내를 깨끗이 치워달라고 부탁했다. 조지는 지시에 따랐지만 대신 이튿날 래리에게 "내 물건들이 다 어디로  갔지?"라는 쪽지를 받았다. 이렇게 물건들을 멋대로 쌓아놓았다는 것은 일을 자극하는 힘이 넘치고 바쁘다는 표시였다.
페이스북의 최고 운영책임자인 셰릴 샌드버그는 구글에 있을 때, 자신의 영업 지원 팀원들에게 각각 50달러씩 주고 각자의 공간을 장식하라고 했다.
지저분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는 없지만 자기표현과 혁신의 부산물이라는 점에서 보통 좋은 신호로 보면 된다. 많은 기업에서 보듯, 이런 성향을 억누르는 것은 놀랄 정도로 부정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다.
(구글은 어떻게 일하는가, 에릭 슈미트)



한쪽은 돈까지 쥐어주면서 지저분하게 만들라고 하는 반면, 다른 한쪽은 개인의 책상 위 업무 환경까지도 관리하고 있었다.


옆에 앉은 사람들이 궁시렁대면서도 하나 둘 자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나를 비롯한 몇 명은 끝끝내 자리를 치우지 않았다.

몇 달 뒤 그 부사장님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다.  



2.

1993년 이건희 회장은 전무급 본부장들에게 호통을 치며 앞으로는 '관리'라는 말을 쓰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본부장들은 벌벌 떨며 - 벌벌 떨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왠지 그랬을 것 같다 - 하나하나 받아 적었다고 한다. 그리곤 부하들에게 엄격히 일렀을 것이다. 절대 '관리'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한겨레 신문, 1993. 8.11, 삼성 이건희 회장 이색 지시 관심 "관리라는 말 쓰지 말라" 변신 촉구


그렇게 '관리'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관리'한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오늘날 기술의 발달은 한층 더 미묘한 관리 방식을 만들었다.


그중의 하나가 스마트폰에 설치하는 MDM (Mobile Device Management)이라는 애플리케이션이었다.  

이름부터 모바일 단말을 '관리'하는 시스템인 MDM은 사내 입문시 자동으로 작동하였다. 사내 사진 촬영을 막고 회사 이메일 열람 및 작성, 간단한 행정 처리 기능 등이 지원되었다. 회사 이메일과 통화내역, 사용자 위치 등이 서버에 저장되어 프라이버시 침해 소지가 있었지만, 보안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인데다 크게 신경 쓰는 사람도 없었다.

다행히 당시 MDM 설치가 강제는 아니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MDM을 사용하고 있었다. 특히 퇴근 후에도 언제 어디서나 실시간 이메일 업무 처리를 위해서는 필수였다.


MDM을 사용하면 스마트폰이 너무 느려지기 때문에, 나는 한동안 MDM 설치를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이런 내 스마트폰을 보며 어떤 상사는,

"MDM 깔면 진짜 편한데~ 너도 깔아~"

라고 웃으며 말하거나 또 다른 상사는,

"아직도 안 깔고 뭐해? 퇴근 후 급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대응할래?"

라고 위기감을 주기도 했다.


끝내 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MDM을 설치했다. 그러자 이상하게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 후 퇴근하고 나서 밤 12시에도, 주말 오후에도 문득 이메일을 체크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무슨 금단 증상처럼 일요일 밤에 이메일을 보지 않으면 마치 다음날 월요일 아침 무슨 일이 생길 것처럼 불안해졌다. '디지털 기기가 낳은 새로운 노예제에 직면'한 것이다.

투명사회, 한병철



직급이 올라갈수록 MDM 의존도는 점점 심해졌다. 과장급만 되어도 상무님이 토요일 새벽에,

'그 신규사업 건은 어떻게 돼가지?'

하고 이메일을 보내면 10분 이내로,

'네! 그 건은 현재 이러 이러한 상황인데 더 자세히 파악 후 월요일 오전까지 즉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라는 답변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주말에 쉬는 것도 아니고 일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시간을 보내면서,

"아 왜 항상 주말에만 일이 생기냐고?"

푸념하면서도 임원의 요청에 적시(?)에 대응하는 자신의 뛰어난 업무 수완을 보며 내심 뿌듯해한다.

'이 상태로만 하면 연말 고과는 문제없겠군.'

그러면서 아직 MDM을 깔지 않은 후배를 보면,

"너 아직도 안 깔았니? 빨리 폰 바꿔~"

라며 핀잔을 주는 것이다.     



3.

그렇게 우리는 피관리자이자 동시에 관리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마치 이등병 시절에 그렇게 욕하던 병장을 내가 점점 닮아가듯이. 낼름 먼저 퇴근하겠다는 후배 사원이 어느 날 탐탁지 않아 보이고, 누군가 휴가를 길게 쓰기라도 하면 무심코 저래도 되나 싶은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말로는 궁시렁 거리면서도 누구보다 MDM을 신경 쓰고 누구보다 이메일을 빨리 확인하고 누구보다 늦게 퇴근하던 나는 어느새 스스로를 관리하고 있었다.  


이제는 회사의 일방적인 관리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자신이 자신을 관리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 스스로가 자신을 경영하고 착취하는 주체가 된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노출하면서 서로를 감시하는 파놉티콘을 만든다.
(투명사회, 한병철)


파놉티콘 (출처 : 뉴욕타임즈)


그러면서 우리는 회사의 관리와 통제에 한껏 불만을 제기한다. 나 자신이 지금의 기업 문화를 확대 재생산하거나 최소한 방관 방조했으면서,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척 회사 탓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더 무서운 점은 어느새 그러한 생활이 당연한 듯 잘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저 오늘 아침도 숱한 출근 중 하나이고 오늘 저녁도 여전히 고단한 하루였고, 큰 애사심은 없지만 몸은 여전히 회사에 충성하고 있고, 그렇게 또 몇 년이 훌쩍 지나가면 그다지 만족스럽진 않지만 딱히 큰 불만도 없는.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되고, 당연하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

우리는 스스로가 피관리자로서 존재를 규정하며 그 틀 안에 순응하는 것을 어느새 가장 안전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퇴근 시간이다. 분명 출근은 9시이고 퇴근은 6시건만 아무도 이를 당연히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6시 퇴근을 가끔 발생하는 희귀한 이벤트(?)로 여기며 감사할 지경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같이 일하던 이집트 출신 동료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내가,

"오늘은 칼퇴 예정이야. 먼저 좀 갈게. 미안."

이라고 말하자 그 친구는,

"No, 미안해할 필요 없어.

칼퇴가 아니라 정시 퇴근이지.

일찍 가는 게 아니라 정상적으로 가는 거야.

'칼퇴'란 말은 없어. (There is no '칼퇴')"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난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참고서적>

구글은 어떻게 일하는가, 에릭 슈미트 외, 박병화 역, 김영사, 2014년

투명사회, 한병철, 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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