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간은 피곤한 채로 태어난다. 그래서 충분히 쉬어줘야 한다. (몬테네그로 속담)
내가 태어났을 때, 엄마 뱃속을 헤집고 나오는 건 정말 피곤한 일이었다. 안락한 양수 생활을 청산하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낯선 세상. 그것부터가 천지개벽할 피로인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매일 아침 태어난다. 아니, 태어나는 것과 똑같은 표정으로 일어난다. 잠에서 깨는 건 마치 태어나는 것과 같은 고통이다. 매일 아침 죽음을 떨쳐내는 것. 오죽하면 이 고통을 이겨내는 사람들을 아침형 인간이라는 자기계발의 승자로 치켜세우지 않겠는가.
자명종은 잠이라는 시간을 초월한 상태에서 시간적 의무가 있는 일상의 영역으로 우리를 갑자기 몰아넣는다. (중략)
인간은 스스로 깨어날 수 없다. 인간은 깨워져야 한다.
(시간, 칼 하인츠 A. 가이슬러)
스마트폰 알람이 울리면 나는 저쪽 세계에서 이쪽 세계로 넘어온다.
누군가에 의해 피기상되는 삶.
그렇게 나는 매일 아침 미국 출장 비행기를 타듯 출근길 버스에서 급격한 시차를 느낀다. 집과 회사와의 거리는 인천과 뉴욕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예전에 어느 신문의 한 컷 그림을 본 적이 있다. 도로에 버스 두 대가 나란히 서 있었다. 오른쪽 버스 창문으로는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이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다들 피곤에 절어 두 눈은 쾡하고 머리는 헝클어져 고개를 숙이고 우울한 표정으로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맞은편 왼쪽 버스 창문으로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서 있었다. 그들 역시 맞은편 직장인들과 똑같은 얼굴과 자세로 서 있었다. 그림 아래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어른이 되면 다를 줄 알았지? 피곤한 건 모두가 똑같은걸...'
2.
오늘날 피로의 가장 큰 주범은 단연 야근이다.
사원은 대리처럼, 대리는 과장처럼, 과장은 부장처럼, 부장은 상무처럼 일해야 경쟁력을 갖는 세상.
이모! 여기 3인분 같은 2인분 주세요!'
우리가 늘상 식당에서 외치듯 회사에서는 100% 리소스를 투입하면 120% '캐파(Capability)'를 발휘해야 한다. 각자의 역할에서 한 단계 더 초월하지 않으면 비정상인 세상. 사원급 월급을 주고 대리급 일을 시킬수록 우수한 관리자로 인정받는다.
모두가 적정 기준보다 더 요구하는 과부하의 시대에서 야근은 절대선이고 칼퇴는 절대악이 된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은 하루 평균 11시간 이상을 회사에서 보낸다고 한다. 한국의 야경이 아름다운 이유가 야근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밤 열두 시 퇴근길에도 환하게 빛나는 빌딩 벽돌은 바로 우리들의 야근으로 쌓아 올린 게다.
자본가는 이익 극대화를 위해 노동자를 착취한다.
(자본론, 카를 마르크스)
자본가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은 추가 노동을 시키는 것이다. 노동자의 임금은 고정되어 있고 비용 대비 일을 더 시키니 투자 대비 효율이 더 올라가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자본론만의 주장이 아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무실에서 매일같이 목도되는 지극히 일상적(?)인 현실일 뿐이었다.
영화 '인타임(In Time)'에서 부자들은 빈자들의 시간을 산다. 빈자는 시간을 팔아 생계를 꾸리고 부자는 더 오래 삶을 영위한다. 시간이 줄어드는 빈자들은 점점 일찍 죽어간다.
피로는 곧 시간의 문제로 귀결된다.
불필요한 야근은 사람의 시간을 강탈하고 생명을 소진시킨다.
야근의 피로가 누적될수록 번아웃(Burn-out)은 감기처럼 흔해진다. 번아웃이 심할 경우 자살로까지 이어진다. 임산부에게 무리한 야근을 강제하다 유산이 된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담당 상사는 "그러게 평소에 몸 관리 좀 잘하지." 한마디 툭 던지고 사라질 뿐이었다. 쓸데없는 야근을 강제하고 피로를 방관하는 상사는 곧 간접살인범인 셈이다.
3.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요한계시록 3장 15-16절)
회사원의 유형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뜨겁거나, 차갑거나, 미지근하거나. 난 세 가지를 고루 겪었다.
신입 때는 '뜨거운 과로(過勞)'의 시절이었다.
난 열정과 포부가 넘치는 신입사원이었다. 첫 날 밤 12시에 퇴근한다는 것에 대한 개념이 미정립 되어 있었고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받아주리라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난 120% 리소스를 가동하며 고과를 잘 받기 위해 치열하게 야근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기꺼이 나를 불살랐고 무엇이든지 다 배우고자 했다. 그 와중에 희생되는 것들에는 한쪽 눈을 감았고, 넓고 얕은 관계에 만족했다. 주변에선 워킹머신이란 소리가 종종 들렸다.
2~3년 차는 '차가운 위로(慰勞)'의 시절이었다.
다들 그렇듯 3년 차 즈음 슬럼프가 왔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조직개편이 되고 부서장이 바뀌면서 그동안 열심히 추진한 업무가 한 순간에 날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임원부터 사원들까지 직급고하를 막론하고 사내정치에 능한 자가 살아남는 현실을 보며 일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그동안 야근하고 헌신한 것들이 허무로 번졌고, 어느 정도 회사를 알게 되면서 과연 이 길이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기들과 회사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일이 잦아졌고, 이직, 공부, 창업 등 서로의 꿈을 그려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곤 했다.
그리고 4년 차가 지나면서 '미지근한 피로(疲勞)'의 시절이 찾아왔다.
슬럼프가 지나면서 4년 차만이 터득하는 달관의 지혜(?)가 있었다. 나 하나쯤 열심히 하지 않아도 별반 다를 게 없구나. 회의 때 아무리 토론해도 결론은 늘 같고, 우리는 이미 누군가 답을 정해놓은 게임 속에서 퇴로 없는 미로를 헤매는 생쥐와도 같구나. 급기야 회의와 불만을 넘어 이젠 무념무상 영혼이 텅 비어버린 '소울리스(Soulless)' 모드로 진입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 적당히 일하다 대충 눈치 보다 퇴근하고 회사에서 주는 맛있는 밥과 연차수당이나 챙기며 그리 혼날 일도 칭찬받을 일도 없는, 무색무취의 밋밋한 삶.
평일엔 자아를 버리고 꾸역꾸역 기계처럼 일하다가 주말이 오면 쇼핑과 마사지로 피로를 푼다. 평일엔 피곤하지만 주말엔 숨통이 트인다. 그러나 피로가 완전히 풀릴 새도 없이 다시 출근을 한다. 그것을 매주 반복하면서 미지근한 피로가 지속되는 것이다.
묘하게도, 이 세 가지 유형은 최근 우리나라 사회의 흐름과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1990년대는 '뜨거운 과로(過勞)'의 시대였다. 산업화 고도성장기의 결실을 위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기업은 세계로 뻗어가고 부동산은 하늘로 치솟았다. 사람들은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벌며 오로지 더 높은 숫자를 위해 대통령 표창 야근 수출탑을 쌓아갔다.
2000년대는 '차가운 위로(慰勞)'의 시대였다. IMF 경제위기 이후 기업은 부도나고 개인은 실직하며 가정은 파산했다. 88만 원 세대로 대변되는 실패와 절망, 상처와 분노의 시대에 여기저기 위로와 힐링의 모닥불을 지펴졌다.
2015년 지금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바야흐로 '미지근한 피로(疲勞)'의 시대인 것 같다. 저성장과 장기불황으로 이제 큰 기대도 큰 실망도 할 수 없는 '포기 세대' - 라고 누군가 이름붙인 - 가 늘어나고 있다. 양극화, 취업난, 주택난 속에 청년들은 '삼포세대' (연애, 출산, 결혼을 포기), '오포세대' (인간관계, 집을 포기), '칠포세대' (꿈과 희망마저 포기), 그리고 N포세대 (무한정 포기)까지 끝을 알 수 없는 절벽으로 내몰리고 있다.
일본에서는 십여 년 전 이미 '사토리 세대(달관 세대)'라는 대중화된 현상으로, 우리나라 역시 빠른 속도로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의 분석이다. 중저가 패스트패션 브랜드를 소비하고 패스트푸드로 간편하게 한 끼를 때우며, 여가는 주로 집에서 TV를 보거나 모바일 SNS 컨텐츠로 가볍게 즐긴다.
적게 벌면서 안분지족하는 삶을 추구한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안정적인 인프라에서 작은 행복을 추구하기에,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후루이치 노리토시)
사토리 세대 (さとり世代) : 자동차, 사치품, 해외여행에 관심이 없고 돈과 출세에도 욕심이 없는 일본 청년들을 뜻하는 신조어. 사토리는 '깨달음, 득도'라는 뜻을 지닌 일본어로, 사토리 세대는 마치 득도(得道) 한 것처럼 욕망을 억제하며 사는 젊은 세대로 정의된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다만 일본처럼 속 편한(?) 달관만 하고 있기에는 우리나라는 너무 피곤하다.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내수와 복지, 안정적인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하다.
십대는 입시에, 이십 대는 취업에, 삼십 대는 야근에, 사십 대는 회식에 늘 피곤하다. 모든 사람이 삶의 모든 과정에서 만성 피로를 느낀다.
그건 어느새 내 모습이 되었다. 무언가를 뜨겁게 긍정하지도, 차갑게 부정하지도 못하는, 그저 미지근한 피로에 골골대며 절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4.
오늘도 나는 피로와 함께 일어난다. 매일같이 왕복 세 시간의 출퇴근 여행을 떠나는 길. 세수하고 대충 옷을 입고 나온 나는 셔틀 시간에 맞추기 위해 헥헥대며 뛰어간다. 왁스는 회사에 가서 발라야지. 지하철을 타고 출근 셔틀버스 대기장소로 이동한다. 태평로 빌딩 숲 사이로 버스들이 늘어서 있다. 나는 맨 앞으로 걸어갔다.
버스 주변으로 서너 명의 아저씨들이 서 있었다. 버스 운송업자 사장의 부당 해고에 대해 피켓데모를 하는 것 같았다. 확성기 홀로 외로이 노래를 부르며 서울의 아침을 깨우고 있었다. 나는 버스에 타기 전 힐끗 아저씨들을 보았다. 칼바람 속 마스크 밖으로 입김이 허덕였다. 점퍼 모자 안으로 아저씨들의 투박한 눈빛이 스쳐갔다. 나는 순간 눈길을 돌렸다.
사람들은 피로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스쳐 지나간다. 마치 어떤 물건 하나가 거기 놓여있다는 듯이. 그런 살풍경을 어느 마트 노동자는 이렇게 썼다.
"삶의 피로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 어린아이들만 시선을 허락한다. 그들은 모자 쓰고 앞치마 두른 나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중략) 나는 문득 사람의 눈길이 그리워졌다."
(4천원 인생, 박권일 추천의 글 중)
버스에 앉자마자 잠이 쏟아진다.
창 밖으로 아저씨들의 노랫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오늘도 버스 안에는 피로감만이 가득했다.
<참고서적>
시간, 칼 하인츠 A. 가이슬러, 박계수 역, 석필, 2002년
자본론 공부, 김수행, 돌베개, 2014년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후루이치 노리토시, 이언숙 역, 민음사, 2015년
4천원 인생, 안수찬 외, 한겨레출판,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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