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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거 Jang Sep 06. 2015

05. 기획과 스탭, 판돌이의 탄생



1.

이제 조조는 이미 백만의 무리를 이끌고 있는데다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고 있는 판이라 그와는 창칼로 다투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중략)
만약 장군께서 익주와 형주를 걸터 타고 그 험한 지세에 기대어 지키시며, 서(西)로 여러 오랑캐와 화친하고 남으로 이월을 어루만진 연후 밖으로는 손권과 동맹을 맺고 안으로는 정사(政事)에 힘쓴다면 두려울 게 무엇이겠습니까? (중략)
이렇게만 하신다면 곧 대업은 이루어질 것이요, 한실(漢室)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삼국지, 나관중, 이문열 평역)


유비의 삼고초려를 맞이하여 제갈량이 제시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 중 일부분이다. 이 말을 들은 유비는 눈 앞이 환해지면서 마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삼국지광이었던 나는 남들처럼 제갈량에 열광해 왔다. 비록 소설을 통해 이상적인 이미지로 재탄생했다 하더라도 완벽한 전략가인 제갈공명이란 롤모델은 풋내기 소년의 마음을 빼았기에 충분했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도 저런 전략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오늘날 기업의 전략기획에 대해 관심이 생겼던 것 같다.
신문과 책에서는 연일 위대한 위인들과 유명인사가 등장했다. 세계 최고의 경영 구루인 피터 드러커, 잭 웰치 이후 세계가 가장 주목하는 CEO인 카를로스 곤, 위대한 한강의 기적을 이룬 정주영, 이병철...
이렇게 글로벌 CEO가 되어 경영 전략을 쥐락펴락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자못 그럴싸했다. 명문대를 나와 전략 컨설팅 회사나 대기업 전략기획 부서에 입사하는 것이 차세대 CEO로 가는 급행 티켓인 것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나는 이십 대 십여 년의 시간 동안 아등바등 달려 경영대학에 입학하고, 컨설팅 인턴에 뛰어들며, 대기업 전략기획 부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사실 지난 시절 느낀 전략기획이란 것은 그렇게 재미있거나 가슴 뛰는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지루하고 건조하며 머리 아픈 그런 것들이었다. 그저 저 하늘 위에 떠 있는 별에 닿을 때까지 추운 밤을 견뎌 사막을 건널 뿐이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이 거대한 세상 속 오히려 나는 더 왜소해져만 갔다.
천하를 주름잡는 전략을 기대했던 나는 갈수록 쪼그라들어, 어느새 사무실 구석 1평짜리 비품실에서 고장 난 복합기를 붙들고 하루 종일 끙끙대는 존재가 되었다.


출처 : tvN 미생



2.


무슨 전략기획이야. 그냥 따까리지. 임원 스탭이라구, 호호."


옆 부서 과장님이 웃으며 말했다.
전략기획엔 왜 갔냐는 과장님의 질문에 나는, "회사의 전략을 배우고 큰 그림을 보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과장님은 철없는 아이 대하듯 나를 보며 웃었다.
나는 속으로 발끈했지만 크게 부정할 순 없었다.

실제로 내가 하는 일들을 보면 '전략기획'이라는 명칭이 참으로 민망해졌다. 하루 종일 보고서 줄 간격 조절하고, 사람들 자료 취합하고, 파일바인더 정리하고 회의실 컨퍼런스콜 전화기 고치고... 어쩌면 업무명이라도 근사하게 지어서 위안이나 삼으라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전략기획'이란 것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사장님과 임원들이 그리는 큰 그림의 일부를 내가 스케치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기업의 거대한 담론 속에 둥둥 떠다녔다. 어쩌면 전략의 실체란 전자신문에서 접하는 기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 내가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아무리 스스로를 '전략 기획가'로 여긴다 할지라도, 실제 업무는 '임원 스탭(Staff)'인 경우가 많았다. 대기업 전략기획이라는 정체성이 권력의 보유 정도에 따라 '기획' 혹은 '스탭'을 오르내리는 것이다.

'기획(Planning)'이 관리한다면 '스탭(Staff)'은 지원한다.   
기획은 임원의 대리적 존재이자 브레인으로 돈(재무)과 사람(인사)을 기반으로 계획(MBO)을 수립하는 핵심 권력을 발휘한다. 현대 경영의 요체인 '관리(Management)'라는 근사한 기법을 마음껏 휘두르며, 세련되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시스템을 구축하고 프로세스를 설계한다. 이것이야말로 대기업에서 제대로 배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강점 중 하나일 것이다.
'관리와 대기업의 발전이 없었다면 기술의 발전과 진보도 없었을 것이며, 취업의 기회와 경제성장도 없었을 것'

기업의 시대, CCTV 다큐  제작팀

이라는 말처럼, 조직 내 기획의 역할은 그야말로 막중하다.


기업의 시대, 중국 CCTV 다큐제작팀



반면 스탭은 임원의 비서이자 충실한 손발이 된다. 스탭은 개발, 영업, 마케팅 등 사업의 핵심 영역을 제외한 회사의 모든 잡일들을 전담한다. 출장 일정을 조율하고, 의전하고, 행정 처리하며, 직원들 간담회 개최와 워크샵 추진도 한다. 임원이 밥 먹을 사람이 없을 경우 밥도 같이 먹어줘야 한다. 그 외에 수많은 잡일들 - 발표 자료 글자 간격 마사지, 네모 칸의 색깔 조정, 배경 디자인 로고 변경, 소개자료 편철, 사무실 책상 정리정돈, 프린터 수리, 노트북 교체, 인터넷 세팅, 이삿짐 포장 등 - 이 끝없이 나온다. 그런 잡일들은 아무리 잘해도 눈에 띄지 않고, 조금만 못하면 금세 불편해진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기획'을 보고 왔다가, '스탭'만 하다 나가기 일쑤였다.


물론 눈치껏 기획력을 습득하는 것은 본인의 몫이겠지만.


그러나 상부에서 다루는 1%의 '기획'은 결국 하부 99%의 '스탭'이 없다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취합과 잡일들로 꾸역꾸역 밤을 세던 날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기획, 영업, 마케팅, 그 어떤 멋들어져 보이는 일들은 결국 마이크로 단위의 수많은 스탭들의 집합체인 것이다.



3.
이제 대기업 전략기획 잡일의 정수(精髓)인 막내의 역할을 살펴보자.  
전략기획 막내의 최대 덕목은 강력한 눈치의 탑재인데, 특히 기획 업무의 꽃인 보고회에서 가장 빛을 발한다.


출처 : 패밀리삼성


우선 '보고회 전(前)' 단계를 보자.

임원 일정에 변동은 없는지, 이전 회의가 몇 분 정도 늦어지는지 비서에게 먼저 체크한다. 관련 참석자들이 다 올 수 있는지 일일이 전화하여 재확인한다. 회의실에 미리 가서 비뚤어진 의자를 정돈하고 물과 필기구를 세팅한다. 빔 프로젝터가 제대로 동작하는지 화면 조도가 너무 낮지는 않는지도 확인한다. 심지어 위층의 공사로 천장에 붙은 빔 프로젝터가 흔들거리자 얼른 떼어내어 테이블과 멀티탭을 가져와 급히 설치한 적도 있었다. 가운데 임원석을 중심으로 직급별 좌석 배치와 보고자료 출력 및 노트북 세팅까지 마무리하고 부장님께 사전 컨펌을 받으면 '보고 전' 준비는 완료이다.  

다음은 '보고회 시행' 단계이다.

사람들이 자리에 착석하면 10분 뒤 임원이 들어와 회의실 중앙 상석에 앉는다. 나는 화면 구석에 앉아 '판돌이'를 한다.

판돌이 : 회사에서 회의 시간에 노트북으로 프로젝터 화면에 자료를 띄우고 넘기는 사람을 이르는 속어, 주로 부서의 막내가 담당하며 마치 그 자리에 없는 인프라인 것처럼 취급됨 (출처 : 내 머리)

판돌이의 최고 자질은 재빠른 손이다. 나는 발표하는 부장님의 눈과 임원의 표정 및 회의실에 띄워진 스크린을 동시에 살피면서 귀로는 발표자의 뉘앙스와 사람들의 토의 내용을 빠짐없이 파악하고 기록한다. 임원이

"추가 관련 내용이 있나?"

하고 물었을 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관련 장표로 이동해야 한다.

Tip : 프레젠테이션 모드 중 키보드 숫자패드에서 해당 장표 페이지 번호를 누르고 엔터를 치면 곧바로 그 화면으로 전환된다

화면 전환, 동영상 재생, 관련 내용 탐색 등 이 모든 것이 0.1초 만에 처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3초라도 지연되면 사람들의 따끔한 눈초리가 나에게로 쏠리는 것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게 보고회가 무사히 끝나면 난 A/S까지 책임져야 한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두 시간 이내로 결과 메일을 발송한다. 재빠르게 핵심 논의 내용을 정리하고, 추후 액션 아이템(Action Item)까지 척척 뽑아내어 20여 명의 참석자 이름을 전부 파악하여 직급순으로 회의록 공유 메일을 발송한다.

회의록을 정리할 때에는 각 발언자들의 뉘앙스를 고려하여 민감한 발언을 순화하는 센스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옆 부서 하이에나 부장님이 득달같이 달려와 두 눈을 치켜뜨고,
"야 신입,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똑바로 안 쓸래?"
하고 들이받을 수 있다.

이렇게 임원 보고회의 전 과정이 끝났다. 이것을 담당 부서장의 관여 없이 혼자서 전부 해낼 수 있다면 전략기획 막내로써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극찬을 듣게 된다.

이렇게 완벽한 판돌이는 처음이군."



4.

이제 전무님은 이미 출장 비행기를 탑승하신데다 사장님을 모시고 의전까지 하고 있는 판이라 그와는 오늘 중으로 보고하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만약 부장님께서 연간 예산과 인력 계획안을 기반으로, 서(西)로 영업팀의 목표 숫자를 공유받고 남으로 마케팅 계획을 취합한 연후 밖으로는 개발팀 회식으로 정보를 얻고 안으로는 오늘 밤 야근을 한다면 두려울 게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만 하신다면 삼일 내로 보고서는 완성될 것이요, 전무님 오시면 바로 보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천하를 꿈꾸던 소년은 어느새 '보고삼일지계(報告三日之計)'를 제시하는 에이스 '판돌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참고서적>

삼국지, 나관중, 이문열 평역, 민음사, 1988년

기업의 시대, 중국 CCTV 다큐제작팀, 허유영 역, 다산북스, 2014년




<퇴사의 추억> 단행본이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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