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티거 Jang Sep 04. 2015

04. 사무실 문명



1.

사무실 문명은 커피와 알코올 때문에 가능한 가파른 이륙과 착륙이 없으면 존립할 수 없을 것이다.
(일의 기쁨과 슬픔, 알랭 드 보통)


으르렁 대며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의 엔진이 순간 고요해지면 나는 잠에서 깬다. 회사 앞에 다 온 것이다.
나는 오늘도 셔틀버스에 앉자마자 잠이 들었다. 출근길 50여분의 단잠은 왜 항상 5분처럼 느껴지는지.


아침 일곱 시 반.

비몽사몽 버스에서 내리면 드디어 사무실 문명의 시작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일렬로 늘어선 버스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다.

찬란하게 번쩍이는 21세기 빌딩 사이로 20세기 직원들이 앞다투어 걸어간다.

나는 아직도 떠지지 않는 눈을 부비적거리며 주위를 둘러본다. 내 옆의 아저씨도 내 앞의 아가씨도 모두가 졸려 보인다. 사무실의 아침부터 '이쪽에는 나의 피로가, 저쪽에는 너의 피로가 있다.'

피로사회, 한병철

개인은 피곤한데 이상하게 전체는 활기가 넘친다. 각자의 파편화 된 피로는 엘리베이터 앞 부장님을 만나는 순간, 기계적인 활기참으로 변한다.     


출처 : 패밀리삼성

오늘도 우리는
테이크아웃(Take-out) 커피를 들고 사무실로 이륙(Take-off)한다.

내 자리에 가방을 놓자마자 임원석으로 향한다. 이미 새벽부터 엉덩이가 의자에 뿌리내린 상무님께 인사를 드리고 자리로 돌아온다. 몇 분 뒤 사람들이 휴가에서 복귀하는 이등병의 표정으로 속속 출근한다.
몇 마디 형식적인 인사 후 우리는 모두 사무실의 뿌리 깊은 나무가 된다.


사무실에는 깊은 적막만이 흐르고 모두가 열심히 모니터를 들여다본다. 나도 딱히 급한 일은 없지만 괜스레 매일 보던 모니터를 이리 저리 살펴본다. 어느새 우리는

'화이트칼라의 필수 보편 요건인 오랫동안 앉아 있기' 시합을 벌인다.

희망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

마치 인류가 앉아 있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모두가 이미 앉아있지만 격정적으로 더 열심히 앉아 있는 모습에 공기마저 멎는다. 오직 위이잉- CPU 소리만이 사무실의 허파처럼 숨을 쉰다.



2.
얼마나 잘 앉아있는가 역시 신입의 중요한 평가 요소이다.

나는 허리를 꽃꽂이 세우고 안정적인 시선으로 모니터를 마주한다. 한 손은 키보드 한 손은 마우스 또 한 손은 노트 필기 또 한 손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능숙하게 오간다.

동시에 두 눈과 귀는 반경 3미터 이내로 안테나를 쫑긋 세운다. 누가 언제 갑자기 나를 찾더라도 즉각 대응할 수 있는 (Ready-to-work) 인스턴트식 태극권 자세를 유지하면서.


인스턴트 태극권 자세


"장사원."
부장님의 부름에 바로 엉덩이를 띄우고 펜과 수첩을 들고 걸어간다. 똘망똘망한 눈빛과 무슨 일이든 문제없을 거라는 표정으로 부장님의 지시를 받는다. 다음주에 새로 시작될 경쟁사 대응 TF에 대한 사전 조사를 해보라는 것이다.

동시에 난 상무님이 사장 보고에 앞서 긴급으로 요청한 스마트폰 시장 데이터를 정리하고, 과장님이 어제 요청한 타겟 고객의 프로파일을 조사한다. 앞 자리에 앉은 대리님에게 엑셀의 수식 기능을 물어보고, 행정사원의 ID가 만료되어 재신청 결재를 올려주고, 갑작스러운 출장 준비로 분노에 찬 동기와 메신저로 채팅을 한다. 또한 부서 변경에 대해 고민하는 후배와 커피를 마시고, 이번 주 야근비 내역과 영수증 정산을 입력하고, 옆 부서에 데모용 태블릿 대여를 부탁하고, 이번 주 금요일 GWP 회식 장소를 예약한다.
매일같이 20여 개의 To-Do 리스트를 갱신하면서 나는 완벽한 '멀티태스킹(Multi-tasking)' 전사로 변모한다. 바쁘다 바쁘다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어느새 자기관리의 프로페셔널(?)로 성장하는 자신을 보며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피로사회'의 저자인 철학자 한병철은 멀티태스킹이란 원래 초식동물의 생존을 위한 기법이라고 말한다. 야생에서 강자일수록 한 가지에 집중하는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갖는다는 것이다.


먹이를 먹는 동물은 이와 동시에 다른 과업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를테면 경쟁자가 먹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고, 먹는 중에 도리어 잡아먹히는 일이 없도록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하며, 동시에 새끼들도 감시하고, 또 짝짓기 상대도 시야에서 놓치지 않아야 한다.
(피로사회, 한병철)


출처 : 중앙일보


실제로 20개의 멀티태스킹을 완료하고 하루를 돌아보면,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성취감은 없고 그저 오늘은 덜 혼났다는 안도감과 혹시 빠뜨린 게 없나 하는 조바심만이 남는다.

철저하게 사무실의 초식동물로 길들여지는 것이다.


멀티태스킹처럼 보이는 행동은 사실 여러 가지 일을 왔다 갔다 하는 것에 불과하며, 이는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실수가 일어날 비율을 50%까지 높인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콰이어트, 수전 케인)

어쩌면 멀티태스킹이야말로 사무실 문명의 퇴화를 의미할지도 모른다.



3.
한 주간 고생한 뒤 드디어 찾아오는 불금!... 인 줄 알았지만 현실은 금요일 회식.

왜 항상 회식은 금요일에 잡히는 걸까.


금요일 회식이 즐거울 수 있다는 믿음. 이러한 긍정주의야말로 사무실 문명의 뿌리 깊은 종교이다.


아침에 기세 좋게 이륙한 사람들은 밤이 깊어지자 술에 취해 여기 저기 착륙을 시도한다


상사들은 회식을 통해 친목을 도모하고 분위기를 쇄신할 수 있다고 믿는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그 대상이 누구냐는 것이다. 현실은 상사 혼자만 친목을 도모하고 분위기를 쇄신할 소지가 많다. 단 한 사람의 여흥을 위해 나머지 모두가 인내하는 구조가 자연스레 형성된다. 상사의 얘기를 웃는 낯으로 들어주고, 상사가 주는 술은 넙죽넙죽 다 받아먹느라 다음 날 속이 쓰리고, 가끔씩 폭언이나 성희롱 등 음주 사고가 발생할 경우에도 먼저 감당해야 하는 쪽은 부하 직원들이다.


"더 열심히 하면 더 잘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회사는 긍정적인 사람을 좋아한다. 더 많이 더 높이 더 크게 지를수록 유능한 상사가 된다.

문제는 본사 시스템을 변경하고, 해외 지법인장 협조를 구하고, 제품 개발팀장과의 조율 등 윗선에서 먼저 풀어야 할 것들엔 한쪽 눈을 감고, 그저 실무자들에게만 눈을 부릅뜨는 경우에 발생한다.
칼과 방패도 주지 않고 싸움터로 내몰면서 다 잘될 거라는 긍정주의로 화이팅한다. 그리고 실패하면 호되게 혼낸다. 할 수 있는데 왜 못하느냐는 것이다. 이처럼,
'할 수 있음의 자유는 해야함의 규율보다 더 큰 강제를 낳는다'

심리정치, 한병철


"내가 그렇게 며칠 밤을,
누에고치가 똥을 싸듯 쥐어짜냈는데,
더 이상 뭘 어쩌란 말이야?!"
임원의 닦달에 결국 참지 못한 어느 부장님의 탄식을 듣고 나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위하여!"
오늘도 우리는 뭘 위하는지도 모른 채 외친다.
아침에 기세 좋게 이륙한 사람들은 밤이 깊어지자 술에 취해 여기저기 착륙을 시도한다.

그러나 대부분 불시착하거나 가끔은 추락하여 행방불명되기도 한다.







<참고서적>

일의 기쁨과 슬픔, 알랭 드 보통, 은행나무, 2012년

피로사회, 한병철, 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2012년

희망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 전미영 역, 부키, 2012년

콰이어트, 수전 케인, 김우열 역, 알에이치코리아, 2012년

심리정치, 한병철, 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2015년



<퇴사의 추억> 단행본이 출간되었습니다. 

브런치에는 전체 내용의 일부만 공개되어 있습니다. 

방금 읽으신 내용이 마음에 드셨다면, 전체 내용을 위한 단행본 구입을 부탁드립니다^^


(좋은 글 한 편을 위해서 작가에게는 최소 10시간 이상의 연구와 습작, 퇴고 작업이 필요합니다. 

양질의 콘텐츠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는 생태계를 위해 함께해 주세요. 

독자들에게 더 좋은 글과 작품으로 보답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http://www.yes24.com/24/goods/32106290?scode=032&OzSrank=1


매거진의 이전글 03. 첫 출근, 화려한 퇴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