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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거 Jang Sep 02. 2015

03. 첫 출근, 화려한 퇴근



1.
출근 첫날,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회색 파티션들, 퍼즐처럼 조립된 자리배치, 알록달록 꾸미다 만 슬로건들.  
'Change, Future, Innovation...'

이런 단어들이 벽에 박제되어 있다.


새로운 사람이 오자 힐끗 쳐다보고 다시 눈으로 모니터를 뚫는 사람들. 사무실엔 똑딱대는 키보드 소리만 가득하다.


출처 : 패밀리삼성


난 모바일 B2B 신사업 팀에 배치되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제품으로 글로벌 기업고객과 교육, 의료, 리테일과 같은 산업 분야의 고객 대상으로 비즈니스를 추진하는 곳이었다.
'B2B라... 대학 시절 내내 보고 들은 게 B2C 뿐인데, 무슨 B2B람.'  
생소한 분야였지만 한편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다. 상무님은 B2B야말로 우리의 미래라며 자신만 믿으라고 눈에 힘을 주어 말씀하셨다.

함께 배치된 두 명의 동기들은 의견이 갈렸다.
"선배한테 들었는데 여기 괜찮다는데?."
"그래? 나는 완전 빡센 곳이라고 들었어."

흠... 모 아니면 도라는 건가. 여느 신사업 조직이 다 그렇듯 회사의 미래 먹거리를 책임져야 함과 동시에 아직은 비주류로서 앞날이 불안정한 것이다.
아무튼 이제 막 신입인 우리가 그런 것을 따질 입장은 아니었다. 더 큰 쳇바퀴로 갈아타기 전까지는 지금 내게 주어진 쳇바퀴를 온 힘을 다해 돌리는 것. 그것만이 신입의 숙명이었다.

첫 번째 숙명은 인사하기였다. 우리는 매일 새벽같이 출근해 상무님을 비롯한 온 부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다녔다.
"안녕하십니까, 신입사원 아무개들입니다!"
혼자 다니기 민망한 우리들은 우르르 몰려다녔다. 큰 소리가 시끄럽다, 목소리가 너무 작다, 인사를 했는데 왜 또 하느냐 등 잡아먹을 듯한 사람들 틈에서 우리는 잔뜩 쪼그라들었다.

그나마 만만한 건 동기들 뿐이었다. 짬을 내어 함께 커피를 마시며 툴툴대던 오후 3시가, 지금 생각하면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었다.

열댓 명의 동기들 역시 다들 대학 시절  내로라하던 스펙을 갖고 있었다. 커피를 마실 때면 누가 무슨 고객사 트럭 아저씨들을 만나 담판을 짓고, 누구는 새벽에 남미 지법인과 스페인어로 콜을 하는 등 벌써부터 무용담의 향연이었다. 나를 포함해 아직 갈 곳을 정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부서 배치를 위한 소리 없는 눈치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내가 가고 싶은 부서에 가는 것,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그리고 회사 생활에 만족하는 것.

훗날 돌아보니 사실 이 세 가지는 별로 연관이 없었다. 원하는 부서라도 일은 재미없고,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도 그럭저럭 만족하며 다닐 수도 있었다.

물론 현실은 이 세 가지 모두 요원했지만. 대부분 우리는 가고 싶지 않은 부서에서 하기 싫은 일을 하며 불만족스러운 생활에 허덕일 때가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더 나은 일을 찾는다는 점에서, 아직은 계속 꿈을 꿀 수 있다는 점에서, 신입은 신입이었다.

그 꿈을 위해 우리는 부서장 면담을 하며 울기도 하고, 밤새 고심하며 장문의 이메일을 쓰고, 남의 회식까지 따라가 부지런히 자기 어필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쌓아온 스펙 전쟁의 전공이 모두 허사가 될 터였다.


2.
내가 지망한 부서는 '전략기획'이었다. 대학 때부터의 로망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순전히 멋들어진 단어와 엘리트 이미지에 혹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어느 날 전략기획 담당 부장님이 신입사원들을 모아 회식을 한다고 했을 때 나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회사 중앙문 앞 어느 선술집. 뜨끈한 어묵탕에 과일안주 서비스를 앞에 두고 부장님이 말했다.
"전략기획은 아무나 받지 않는다.

지금은 신입 T/O가 없다.

우리는 당장 써먹을 경력자를 원한다."

그 말을 듣자 순간 하늘이 노랗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훗날 '미생'에서 오과장이 처음 입사한 장그래에게,
"왜 너야?

우리에겐 일당백이 필요해, 알지?"
라고 원망하는 장면에서 나는 그때의 그 선술집이 생각났다.
입사의 기쁨도 잠시, 나는 또 다시 거절감과 자괴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출처 : tvN 미생


다음 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본격적인 생존 전쟁은 시작되고 있었다.

지나다니며 힐끗 본 부장님의 호기로운 표정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어디 한 번 나를 설득해봐라. 후후...'


전략기획이 정확히 무얼 하는 곳이고 내가 왜 그것을 원하는지도 제대로 몰랐지만 나는 다른 선택지도 아무런 힘도 없었다. 전략기획 외엔 다른 곳은 생각해 보지 못한 나는,

그저 내게 주어진 쳇바퀴를 또다시 열심히 돌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쳇바퀴는 회식이었다. 회식에서 신입의 존재는 오디션 합격을 위해 무대 위에 선 무명배우와도 같았다. 난 평소의 소심한 성격을 숨기고 싹싹하고 쾌활하게 보이려 무던히 노력하였다. 그 순간만큼은 못 먹는 술도 잘 먹어야 했고 못 하는 것도 다 잘해야 했다.


두 번째 쳇바퀴는 야근이었다. 출근 첫날부터 밤 12시에 퇴근을 했다. 누구도 가지 말라는 사람도 없었지만 매일같이 밤 10시 전에는 사무실을 나갈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맡은 일을 다 끝내면 선배에게

"다른 할 일이 없을까요?"

하고 자동적으로 물어보게 되었다. 신입에게 니 일 내 일이란 게 어디 있으랴. 그저 닥치는 대로 더 많이 더 빠르게 배울수록 좋다는 것은 사무실 종교의 오랜 믿음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매일 밤 몽롱한 벚꽃길을 걸으며, 난 김원준의 '모두 잠든 후에'를 흥얼거렸다.

반쪽이 되어버렸지 남겨진 채 부서지는 내 마음
모두 잠든 후에 사랑 할 거야 아무도 모르게 마음으로
모두 잠든 후에 기억하는 건 많아도 내
놓쳐버린 순간들엔 한숨뿐
(모두 잠든 후에, 김원준 1집)


밤 12시 퇴근길


그해 봄 퇴근길, 벚꽃은 유난히 화려했다.

벚꽃이 만개할수록 나 역시 사무실의 독실한(?) 신자, 아니 신입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결국 나는 전략기획으로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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