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매년 6월 대망의 하계수련대회가 끝나면 공식적인 신입 시절도 끝났다고 본다. 하계수는 5천명에 달하는 그룹 전체 신입사원들과 부회장을 비롯한 최고경영진들이 대거 참석하는 그야말로 국내 최대의 - 아니, 아마 단일 기업 신입 대상으로는 우주 최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 초호화 단합 대회였다.
4월부터 각종 운영 스탭, 응원단, 공연팀 등 사전 준비팀을 모집했다. 잘 나가는 동기들은 이미 응원단장, 댄스팀, 인사 TF 등 요직을 두루 점하며 한 달이 넘도록 업무에서 열외되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었다.
중요한 행사니만큼 사전 연습을 위해 체육관 강당에 수백명이 모였다. 어제 막 공장에서 생산된 것 같은 치어리더용 솔과 깃발이 배분되었다. 솔을 흔드니 플라스틱 합성섬유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우리는 강대상 위 마이크의 구령에 맞춰 사열종대로 앉고 서고 돌고 뛰며 하루종일 합을 맞추었다. 단 한명이라도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장내에는 수백명의 먼지가 풀풀거렸다.
모두가 궁시렁대지만 아무도 그만두는 사람은 없었다.
지난한 연습의 성과는 하계수 당일 진가를 발휘했다.
우리는 월드컵 경기장보다 더 큰 무주의 대운동장에 집결했다. 사업부별로 알록달록 옷을 맞추고 5천명이 군집한 모습이 마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군대 같았다.
응원단장 동기가 무대 앞으로 나와 두 팔을 번쩍 들고 외쳤다.
"여러분, 준비됐습니까?!"
"네~~!"
5천명의 뜨거운 함성이 6월의 덕유산을 뒤흔들었다.
"그럼 다같이, 스타-트!"
음악이 나오자 놀랍게도 5천명이 마치 한 몸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5천명을 도화지로 삼은 카드섹션은 형형색색 글자가 되고 유니콘이 되어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어느 팀이 연습을 위해 1박2일 합숙까지 했다는 말을 듣고 난 혀를 내둘렀다. 한껏 먼지를 뒤집어 썼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마지막 세러모니로 5천개의 모자들을 하늘 높이 던지는 순간, 우린 마치 하나가 되는 것 같았다.
2.
하나가 된다는 건 무엇일까.
우린 진짜 하나가 되고 있는 걸까. 아니면 '하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획일화'를 합리화하고 있는 건 아닐까.
원래 우리는 학창 시절 내내 운동장에서 사열종대 차렷 열중 쉬어를 반복하는 '하나'됨이 익숙한 세대이다. 학교와 군대와 회사에서 가장 먼저 외치는 것이 바로 하나됨이 아니던가. 같은 교복 같은 군복 같은 정장들.
회사에는 매년 똑같은 신입들이 입사해 똑같은 일을 한다. 그 위에는 똑같은 과장, 똑같은 부장, 그리고 똑같은 임원들이 있다.
모두가 똑같은 검은 차를 타고 똑같은 회색 빌딩 사무실에 앉아 똑같은 말을 한다.
처음엔 재기발랄하던 신입사원도, 참신하고 톡톡 튀던 외부 경력직도, 하버드 MBA 출신의 명석한 부서장이 새로 와도, 어찌 된 일인지 한 달 뒤에는 모두 똑같은 '하나'로 수렴한다. 꼭 이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도 별 상관없을 똑같은 일들만 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동일한 질문에 동일한 패턴의 해법을 제시하기 때문에 한국 기업들은 마치 한 사람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조직의 재발견, 우석훈
어쩌면 우리가 관료제라 부르는, 그 조직이 피라미드인 까닭은 수만명의 사람들을 한 사람처럼 존재하게끔 보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개인 역시 은연중에 '획일화'라는 말엔 거부감을 가지면서도, 나 하나가 조직의 '하나됨'에 포함되지 못한다면 불안해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내가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어릴 때부터 뉴스나 드라마를 보며
'난 저렇게 다 똑같은 평범한 샐러리맨이 되지 않을거야.'
라고 다짐하면서도, 거기서 강조하는 가장 가고 싶은 기업 1위를 찾아 가게 되었다. 늘 말로는 다른 가치를 위해 살겠다면서, 현실은 남들이 인정하는 코스를 밟으려고 했다. 결국 경영대와 토익, 인턴이라는 전형적인 루트를 통해 입사하고 난 뒤, 회사생활을 하면서 또 다시 더 전형적인 여론 사회에 갇히고 만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대부분 우리들은 교회나 도덕률에 얽매여 사는 게 아니라, 소위 여론이라고 하는 무명의 권위에 억눌려 살고 있었다.'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 롤로 메이
주변에서 일하는 만큼 일하고 주변에서 쇼핑하고 여행가고 밥 사먹는 만큼 똑같이 한다. 모두가 똑같은 영화와 똑같은 백화점 똑같은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에서 똑같은 인생을 살아간다.
직장인이든 소비자든 다들 바쁘고 시간이 없고 여론과 집단에 합일하기를 원하는 우리들은 점점 프랜차이즈를 선호한다. 프랜차이즈는 간편하고 검증되었으며 최소한 남들이 하는 만큼은 한다는 안도감을 주기 때문이다.
프랜차이즈 조직은 스피드도 빠르다. 많은 사람이 모여 복잡한 일들을 처리하는 회사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빠른 속도이다. 이것 저것 실험하며 느긋한 사색과 창의성을 발휘할 시간은 없다. 프랜차이즈 조직은 어디를 가도 상명하복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된다. 회의 시간이 늘 아무런 이견 없이 평화로운 이유이다.
하나가 된다는 건 이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운 일일게다.
하계수의 5천명의 카드섹션 역시 순간 아름다웠다. 단 그것이 한 눈에 보일 경우에만.
사실 5천명 중 한명일 뿐이던 나는 정작 이 집단 카드섹션을 볼 수 없었다. 그저 먼지가 가득한 운동장에서 동기의 뒤통수만 바라보며, 열심히 솔을 들고 카드판을 돌리며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다행히 운동장에는 거대한 전광판이 있어서 전체 모습을 드문드문 볼 수는 있었지만.
어쩌면 지금도 우리는 사무실에서
누군가 나눠준 카드 섹션을 열심히 돌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먼지가 가득한 사무실에서 그저 모니터 앞만 보며 열심히 무언가를 반복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곳엔 전광판도 아름다운 그림도 없다.
슬프지만 그것을 흥미롭게 봐주는 사람조차 아무도 없다.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참고서적>
조직의 재발견, 우석훈, 개마고원, 2008년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 롤로 메이, 백상창 역, 문예출판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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