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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거 Jang Sep 10. 2015

07. 피고용자 사회



1. 피고용자


'피고용자(employee)'라는 말은 194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거의 쓰이지 않았다고 한다. 원래 '누군가로부터 고용된다'는 의미는 전적으로 주인을 위해 일한다는 뜻이었다. 피터 드러커에 의하면, 현대의 조직에서 피고용자라는 단어가 쓰이게 된 것은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었다.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 피터 드러커

어릴 적 꿈이 피고용자인 어린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린 장성하면 대부분 피고용자가 된다.


의사는 대형병원 페이닥터로, 변호사는 대기업 과장으로, 요리사는 제과기업 개발직으로, 학자는 경제연구소로, 목사는 대형교회 계약직으로,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모두가 피고용된다.

부르주아지는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 등을 자신들에게서 돈을 받는 임금 노동자로 바꿔놓았다.
(공산당 선언, 카를 마르크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은 '피고용'을 위해 몇 년씩 전전긍긍하며 스펙을 쌓고 MBA를 간다. 오늘날 현대 자본주의에서 피고용자는 가장 흔한 단어가 되었다.


피고용자 사회의 본질은, 말 그대로 우리는 철저히 피고용자라는 사실이다.
고용되기 위한 존재, 즉 누군가에게 팔리기 위한 존재이다.  '인간'이라기보다는 '인적자원'(Human Resource)이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제품인 것이다.

지금부터 이 제품의 생애를 한번 톺아보기로 하자.



2. 생산


이 제품의 생산 기간은 장장 20년에 달한다.
처음 12년은 '초중고'라고 불리는 공간에서 '국영수'라는 핵심 원료가 주입된다. 이후 4년간은 '대학'이라는 곳에서 본격적인 스펙이 세팅된다. 군대 2년, 휴학 2년이라는 추가 공정을 거치면 비로소 완제품(?)이라 불릴 만한 수준이 된다. 총 20년의 생산 과정을 겪는 셈이다.  

전국의 모든 제품이 동일한 프로세스를 거친다. 제일 먼저 수능이라는 1차 공정을 통해 학벌 프레임(Frame)이 제작된다.

이를 기반으로 학점과 토익, 자격증 등 실내 설비에서 2차 공정에 들어간다.

3차 공정에서는 동아리, 봉사활동, 교환학생, 홍보 기자단 등 다양한 외부 활동이 추가된다.


이렇게 제작된 시제품(Prototype)은 인턴이라는 사전 테스트(Pilot Test) 과정을 통해 제품성을 검증한다.

이러한 공정 중 몇 개라도 누락된다면 제품 경쟁력에 흠이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학에선 효과적인 공정 관리와 판매를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렇게 본 제품은 학교의 주입식 교육을 통해 '기계화'를, 대학의 스펙 경쟁을 통해 '표준화'를, 최종 구매처인 기업에서는 세분화된 '분업' 과정을 거치게 된다.  


기계화, 표준화, 분업.

산업화의 3대 요소를 골고루 갖춘 완벽한 제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생을 무력화하는 분업, 생활의 표준화, 생명체보다 우위에 있는 기계들, 그리고 자발성에 대한 조직의 우위"입니다. 우리가 지난 백 년 동안 열광적으로 받아들인 산업문명, 기계문명이 이런 얼굴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불안과 공포의 모습으로 내 자식과 손자 손녀들이 살게 될 내 집 담을 넘겨보고 있습니다.
(생명이 자본이다, 이어령)



출처 : Spiegel




3. 마케팅


이제 효과적인 제품 판매를 위한 마케팅을 펼쳐야 한다. 생산에는 20년이 걸렸지만 마케팅은 두어 달이면 끝난다.
우선 제품의 컨셉에 대한 브랜딩 작업이 필요하다. 제품의 차별화, 특장점, 타겟 포지션 등을 고민하기 위해 취업 특강, 선배와의 만남, 커리어 코치, 적성검사 등을 닥치는 대로 섭렵한다. 다행히 서점에는 자신을 브랜딩하라는 수천 종의 베스트셀러 자기계발서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모두가 이 책을 보고 '나를 하나의 상품으로 차별화하라', '나만의 핵심 브랜드를 찾아라', '회사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어필하라' 등 똑같은 준비를 하게 된다.

다음 단계는 홍보이다. 애석하게도 우리의 유일한 홍보 수단은 자기소개서이다. 가끔 정식 서류 절차가 아닌 구두(口頭) 추천으로 비밀스럽게 홍보되는 제품도 있긴 하지만.

대다수 제품들은 몇 날 며칠을 씨름하며 영혼의 밑바닥에 붙은 누룽지까지 박박 긁어모아 '자소설'을 집필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개월을 공들인 이 '자소설'들의 99%는 서류 심사자에게 10초도 채 읽히지 못하고 버려진다.

홍보를 많이 할수록 홍보에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그럴수록 홍보는 더 자극적이 된다. 어떻게든 차별화를 해야 한다. 남들과 다른 그 무엇이든 자기소개서의 소재로 활용된다. 그냥 별 일 없이 살아온 인생이 마치 엄청난 열정과 비전 속에 계획된 것처럼 포장된다.
'여행을 통해 도전정신을 배웠고, 봉사 활동을 통해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몸으로 느꼈다는 식으로 말이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오찬호 해체




4. 영업


제품의 생산, 브랜딩, 홍보까지 성공적으로 추진했다면, 이제 대망의 영업이다. 영업이야말로 비즈니스의 꽃.

본 영업의 꽃은 입사 면접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성공한 제품도 여기에서는 속속 실패한다. 그래서 우리는 각종 면접 스터디는 물론 모의 인터뷰(Mock-interview)와 개인 과외, 심지어 성형수술까지 한다.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에는 주인공이 아들에게 충고하는 장면이 있다.
"무조건 남들의 호감을 사도록 하여라. 그러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라고.'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 롤로 메이


출처 : Constant Contact


피고용의 핵심은 호감이다. 우리는 호감을 위해선 거짓말도 해야만 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입사 면접 중에, '삼성에 대한 비판이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질문이 있었다. 나는 '삼성의 장단점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 단점은 보완하고 장점은 최대한 개발하여 알리도록 하겠다.'라고 대답했다. 칼자루를 쥔 사람 앞에서 재벌의 폐해를 비판하거나 무노조에 반대한다는 말은 면전에서 할 수 없는 노릇이다.   



5. 판매 및 A/S


자, 축하한다. 드디어 이 모든 단계를 통과했다. 이제 판매가 이루어진다. 보통 국내 대기업 기준 연봉 3~5천만 원 정도의 시가로, 대졸 신입사원이란 제품이 계약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판매 이후 보통 세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은 알아두자.

첫째, 구매자와 실사용자가 다르다. 서류심사와 면접은 인사팀 및 본사 파견 임원이 본다. 그들이 구매결정자들이다.

그러나 실제로 배치되는 곳은 사업부의 수많은 부서들이다. 구매자는 본인이 사용하지도 않을 제품을 결정해야 하고, 실사용자는 본인이 결정하지 못한 제품을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다.

제품 사용에 있어서 심각한 갭(Gap)이 발생하는 것이다.

둘째, 고스펙 제품을 단순 용도로만 사용한다. 몇백만 원짜리 스마트 TV를 샀지만 어차피 그냥 TV만 본다.

사상초유의 스펙 전쟁을 뚫고 온 어벤저스급 사원들이지만 하는 일은 2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도 옆 부서 엘리트 과장님은 몇 년째 똑같은 엑셀 숫자들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셋째,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본 제품의 사후 서비스(A/S)가 없다는 것이다.

제품을 판매한 학교나 사용자인 회사 그 누구도 A/S를 책임지지 않는다.  

그럼 누가 A/S를 해야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제품 자신이다.

갈수록 경제는 불황인데 회사는 급변한다. 멀뚱멀뚱 있다간 내가 공들여 쌓은 초스펙 제품 경쟁력은 순식간에 구닥다리가 될 터이다.

셀프 A/S, 즉 '자기계발'이 절실한 시점이다. 지난 20년 동안 누군가로부터 생산되고 판매된 이 제품은 앞으로 50여 년이 넘는 여생을 오롯이 스스로 생존해 나가야만 한다. 그렇게 제품 사양명세서(레쥬메)에는 제품 스스로 진화하고 계발된 이력들로 빼곡히 채워진다.


즉, 피고용자 사회의 끝은 결국 영원한 자기계발로 귀결된다.


그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고쳐나가며 스펙을 보강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이 별에서 저 별로 외로이 옮겨 다니는 히치하이킹'을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4천원 인생, 안수찬 외



출처 : The Sun





<참고서적>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 피터 드러커, 이재규 역, 한국경제신문사, 2002년

공산당 선언, 카를 마르크스 외, 이진우 역, 책세상, 2002년

생명이 자본이다, 이어령, 마로니에북스, 2014년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오찬호 해제, 후루이치 노리토시, 이언숙 역, 민음사, 2014년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 롤로 메이, 백상창 역, 문예출판사, 2010년

4천원 인생, 안수찬 외, 한겨레출판,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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