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벽 4시에 일어났어요."
이름이 '아야(Aya)'라는 학생은 말했다.
오사카에서 히로시마까지 차로 4시간.
오늘 새벽에 출발해 도착한 뒤, 다시 오늘 밤에 돌아가는 일정이라고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왕복 8시간을 투자할 만한 일은 과연 어떤 것일까?
어떤 가치라면 그만한 시간을 쓸까?
가장 친한 친구의 결혼식?
대통령이나 연예인의 방문?
10억 원짜리 로또 당첨 기회?
그것도 아니면 아야처럼 생면부지의 외국인들을 만나 무언가 얘기하고자 하는 시간?
그 시간이란 바로,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아쇼카(Ashoka) 체인지 메이커 익스체인지(ChangemakerXchange)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전 세계 사회혁신가 청년들이 모여 컨퍼런스를 하는 날이었다. 나 역시 말석이나마 자리를 차지하여 몇몇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꽤 많은 학생들이 오늘 단 하루를 위해 저 멀리 땅끝에서 날아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야처럼 왕복 8시간은 기본이요, 어떤 친구는 홋카이도에서 기차를 두 번 갈아타고 버스를 또 갈아타느라 왕복 24시간이 넘게 걸린다며 해맑게 웃어 보였다.
과연 어떤 가치라면, 우리는 그만한 시간을 기꺼이 내어 놓을 수 있을까?
고등학생 '타쿠마(Takuma)'는 요즘 가장 큰 고민이 엄마라고 했다.
왜 그러니 하고 물으니, 자신은 아프리카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은데 엄마는 반대한다는 것이다.
남들처럼 좋은 대학, 좋은 회사 - 예컨대 도요타나 미쓰비스 같은 - 에 가서 안정적으로 살길 원한다는 엄마.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 타쿠마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할지 잠시 고민이 되었다.
"일단 당연히 공부는 열심히 해야겠지?"
"네, 아프리카 가려고 열심히 하고 있어요."
"Good, 네가 2년 뒤 대학에 가면 아프리카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단다."
"어떻게요?"
"아르바이트를 해서 여름방학 때 다녀오거나, 정부나 대사관, 기업 등에서 제공하는 해외 교류 프로그램을 찾아봐야 해.
물론 네가 열심히 아르바이트도 해야겠지. 지금 당장 아프리카 대사관에 이메일을 보내서 어떻게 갈 수 있는지 다양한 방법들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방법도 있을 테고..."
그러자 타쿠마의 표정이 금세 환해졌다.
"Ah, Thank you so much. It helps a lot."
좋은 대학과 좋은 회사를 가고 난 뒤, 아니면 그 전에 타쿠마는 정말 아프리카를 갈 것인가?
이런 생각들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 아이의 눈빛은 분명히 초롱초롱 빛나 보였으니까.
2.
개인의 가치관은 어떻게 형성되는 걸까?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는 타고 나는 걸까, 아니면 사후적인 환경의 영향을 받는 걸까.
이제는 대학생이 된 '와카나'라는 소녀는 동일본 대지진 (2011.3)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불과 중학교 졸업 이틀 전, 발생한 대지진으로 인해 주변 친구들과 가족들의 희생을 목도한 소녀.
그 후 3년 반 동안 단 한 번도 그것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잊으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구마모토 지진이 발생했을 때 (2016.4), 이제는 대학생이 된 소녀는 달라져 있었다.
발생 소식을 듣고 난 뒤 즉시,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친구와 함께 현장으로 이동하였다. 신속히 필요한 물품들을 챙기고, 지역 정부에 연락하여 필요한 조치를 함께 취했다고 한다. 불과 지진 발생 소식을 들은 뒤 몇 시간 만의 일.
그 후 그녀는 재해를 대비하고 피해자를 위로하기 위한 다양한 예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 대학생이 된 소녀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곳에서 내가 필요로 하는 행동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소녀를 보며 나는 자문했다.
'지금 여기,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타이밍은 무엇인가?'
나의 타이밍을 미뤄버리면,
그때그때 미루는 습관이 늘어나면,
이제는 아무리 큰 지진이 와도 영영 감지할 수도 없게 되는 건 아닐까.
오늘도 크고 작은 쇼크들이 분명히 우리를 강타하고 있을 텐데 말이다.
3.
히로시마 도심의 강가에는 쓰러져 가는 핏빛 건물 한 채가 외로이 서 있다.
2차 세계대전의 원폭으로 인해 반경 10Km 이내 모든 건물이 파괴되었을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건물이라고 한다.
내게도 그런 것들이 있다.
시간이 흘러 거대한 충격이 몇 번씩 지나도 남게 되는 기억의 정수(精髓)와도 같은 것.
시간이 지나도
남게 되는 것들이 가치 있는 걸까.
가치 있는 것들이 남게 되는 걸까.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 박인환, 세월이 가면
나의 스무 살은 영영 가버렸지만, 나는 이따금 그때의 가장 강렬하게 타올랐던 열정들을 떠올린다.
그렇게 몇 년을 애매하게 전전긍긍한 결과 이제 남은 건 '내가 그를 잊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사실'일진대,
그것이 이제는 미련조차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나의 자각이, 여전히 내게 남아 있는 것이다.
제대하던 날,
"기분이 어떠십니까?"
갓 들어온 신입의 부러운 듯 파릇파릇한 질문에, 나의 2년여의 시간이 무색하게 여전히 태양은 뜨겁고 도시는 바쁘고 구름은 피고 또 지고 있을 뿐임을 깨달았을 때,
무슨 소용이 있는가? (A quoi for?)
아무 소용없다. 아무것도! (A nien, nien!)'
- 전혜린, 목마른 계절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하는 것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미지근한 인생들을 태워 보내면서,
시간의 퇴색에 따라 그리 아름답지도 경이로울 것도 없는 생의 조각들이 바람에 마모되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게 되는 것들에 나는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
4.
매년 다보스 포럼에서는 CNN 기자들이 대기업 회장들과 인터뷰를 한다. 기자들은 의레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 위기가 언제 끝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잘못된 질문이다.
보다 중요한 질문은,
"이 위기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라는 것이다.
잘못된 질문에서 시작하면 아무리 좋은 답을 얻어도 의미가 없다.
가치란 무엇인가, 짐 월리스
그러나 우린, 슬프게도 질문조차 허용되지 않는 시대를 살아왔다.
왜 시험 성적이 백점이 되어야 하는지,
왜 성적에 맞춰 대학을 가야 하는지,
왜 대학에서는 취업 준비만 해야 하는지,
왜 취업에는 성공해도 인생에선 성장하지 못하는지에 대해 그 누구도 묻지 않는 시대.
이러한 시대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지금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것이 정말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인가.
지금의 타이밍에서 내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내게 남는 것은 무엇이 될 것인가.
어찌 보면 우리의 인생은 이러한 것에 대한 답을 끊임없이 찾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각자의 가치와 시간을 일치시키기 위해 우린 어떻게 해야만 하는 걸까.
(2016. 11 업데이트)
<퇴사학교> 단행본이 출간되었습니다.
위에 언급된 답을 찾기 위한 그동안의 과정과 나름의 소결들을 정리하여 집필을 하였습니다.
보다 자세하고 다양한 내용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단행본 구입을 부탁드립니다^^
(좋은 글 한 편을 위해서 작가에게는 최소 10시간 이상의 연구와 습작, 퇴고 작업이 필요합니다.
양질의 콘텐츠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는 생태계를 위해 함께해 주세요.
독자들에게 더 좋은 글과 작품으로 보답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http://www.yes24.com/24/goods/33397349?scode=032&OzSrank=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