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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재경 Aug 29. 2022

내 MBTI는 INFP, 그러나 여행지에서는?

뛰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여행만 가면 다른 사람이 되고는 한다. 마치 ‘여행 자아’가 따로 있는 것처럼 말이다.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에 MBTI도 바뀌는 것 같다. 낯가리고 무계획을 일삼는 INFP인 내가 여행지에서만큼은 야시장 상인과 제법 흥정도 잘하고 일정 관리도 알아서 척척 하는 E이자 J형 인간으로 변한다. 


평소엔 장기적인 계획 따위 세우지도 않으면서 여행 갈 때만큼은 몇 달 전부터 정말 꼼꼼하게 정보를 수집한다. 온라인 여행 커뮤니티와 SNS를 샅샅이 뒤지며 꼭 가봐야 할 명소부터 맛집까지 열심히 찾아 저장해두기도 한다. 대략 어떤 장소에 가야 할지 청사진이 나오면 그때부턴 하루 단위로 미리미리 여행 스케줄을 짜둔다. 해외로 떠날 때는 출국 한두 달 전부터 환율 동향을 살핀다. 환율 우대를 잘해주는 은행을 누구보다 냉철하게 판단한 뒤 적기에 환전하는 게 나의 특기다. 여행지에 도착하면 공항에서 숙소까지는 어떻게 이동해야 하는지, 휴대폰 유심 칩은 어디에서 구매하는 게 가장 좋은지 사전에 체크해두는 건 물론이다.


몇 년 전 휴양지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그곳에서만큼은 여유를 만끽해보자고 다짐했건만, 여행 자아는 그때도 어김없이 강력한 존재감을 뽐냈다. 당시 내가 머물던 리조트는 투숙객들이 모두 늦잠을 자고 느지막하게 일어나 조식을 즐기며 한껏 게으름을 피우는 분위기였다. 그 가운데 나만 혼자 새벽 수영을 다니는 직장인처럼 해가 뜨자마자 수영을 하고, 일행 중 1등으로 조식까지 부지런히 챙겨먹었다. 한국에서는 새벽 운동은 무슨, 아침도 제대로 챙겨먹지 않는 내가 여행만 떠나면 다른 누군가에 빙의한 듯이 꽤나 계획적이고 엄격하게 여행을 즐긴다. 그렇다 보니 예전에 나와 함께 여행을 갔던 친구는 “군대에서 행군할 때보다 더 힘들었다.”라는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사실 나도 느긋한 여행을 하고 싶을 때가 많다. 여행기를 좋아해 종종 읽는 편인데, 내가 본 여행기 속 저자들은 하나같이 여행지에서 즐기는 여유를 사랑했다. 느린 걸음으로 마을을 산책하고, 낮에는 한적한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때로는 선선하게 바람 부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에 빠져드는 것…. 이것이 그 책들에 묘사된 진정한 여행이었다. 그래서 여행기를 읽을 때면 ‘나도 다음번에는 저렇게 여유 넘치는 여행을 해야지.’라고 늘 다짐하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행지에 발을 내딛고 나면 넘치던 여유가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 대신 관광을 못 해 죽은 귀신이 붙은 것처럼 오만 관광지를 다 돌아다녔다. 그 지역에서 맛있다는 음식도 다 먹어봐야 했고, 랜드마크 앞에서는 사진도 꼭 한 방 남겨야 했다. 심지어 기념품 가게에 들러 조악한 기념품도 한두 개는 사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여행기 속 우아한 여행자들과 달리 촌스럽게 ‘관광객 코스’를 모두 밟는 것이 나의 여행 스타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행 자아로 자주 여행을 다니다 보니 이 여유 없고 촌스러운 녀석과 제법 정이 들었다는 거다. 최근에는 지난 여행을 곱씹다가 이 친구의 장점도 발견했다. ‘뛰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뭔지 나에게 알려준다는 거다. 평소 부지런히 사는 사람들에게는 멈췄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을 테다. 그런데 ‘누울 수 있는데 왜 앉아?’라는 생각으로 일상을 게으르게 사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별로 와닿지 않는 말이다. 왜냐고? 난 평소에도 늘 멈춰 있으니까! 


나처럼 잘 멈춰 있는 사람에게는 걸어야, 혹은 뛰어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걸 여행지에서 만난 나의 또 다른 자아를 통해 알게 됐다. 촌스러운 이 자아 덕분에 나는 여행에서만큼은 에피소드가 많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여행지에서는 일상에서보다 성취감도 자주 느낀다. 웬만한 명소들을 다 찍고 클리어했으므로! 부지런히 돌아다닌 덕에 남들은 못 봤을 아주 생소한 풍경을 보기도 했다. 이를 테면 새벽녘 로마의 트레비 분수에서 청소원들이 청소기로 동전을 쓸어 가는 풍경 같은.


나는 아마 앞으로도 여행기 속 여유롭고 멋진 여행자는 되지 못할 것 같다. 남들 눈에는 관광에 열심인 그저 그런 시시한 여행자 중 한 명으로 보이겠지. 그래도 나에게 일상 속 자아 하나만 있는 것보다는 촌스럽고 우악스러운 여행 자아도 함께 있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느 정도 밸런스가 맞춰졌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지거든. 누구는 멈추라고, 누구는 뛰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나는 이 두 자아를 데리고 뛰었다 쉬었다 누웠다 걸었다 하며 살아볼 참이다.




추천사

사는 게 피곤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꾸만 다짐하는 특징이 있다. 다음에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지, 내일은 이렇게 말해봐야지, 라고. 마음을 자꾸 가다듬는다는 건 실수를 곱씹는단 뜻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픈 사람만이 습관적으로 후회하니까. 이들은 타인의 장점은 쉽게 찾아내면서 자신에겐 엄격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초라하다고 느끼기 쉽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이 책은 스스로를 소심하고 줏대 없다고 평가하는 저자가 그런 자신과 잘 지낼 수 있는 삶의 방식들을 찾아본 결과다. 서재경 작가가 이어가는 이런저런 다짐들은 잘 살고 싶은 마음에 오늘은 피곤했으니, 내일은 좋아질 거라는 다독임으로도 읽힌다. 작심삼일이 취미고 실망하는 게 특기이며 스스로를 애매하다고 생각하는 이에게 특히 추천한다.

- 정문정(작가, 《더 좋은 곳으로 가자》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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