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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재경 Aug 31. 2022

유재석에게도, 나에게도 고역인 이것은?

일탈은 내 취향이 아닌데!

어느 더운 여름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중이었다. 그 당시 내가 아르바이트하던 곳은 우리 집에서 한 시간 사십 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또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내려서 한참을 걸어야 할 만큼 멀어서 조금만 늦게 나와도 지각을 할까 봐 늘 전전긍긍 초조했다. 그날도 늦지 않으려 부지런히 걷고 있는데 거의 도착했을 때쯤 어디에선가 ‘빵’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웬 자동차 한 대가 내 앞을 막아서는 게 아닌가. 어리둥절해 쳐다보고 있는데 차창이 스르륵 내려갔다. 헉! 창문 뒤로 그 당시 내가 좋아하던 가수 S의 얼굴이 보였다. 콘서트까지 다녀왔을 정도로 그의 팬이던 나는 들뜨고 반가운 마음에 사인도 받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길에 서서 S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곧 알바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었다. 얼른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자리를 뜨려는데 그가 내게 물었다.


"드라이브 시켜줄까?"


오 마이 갓!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 최애 가수가 나에게 드라이브를 제안하다니! ‘성덕(성공한 덕후)’도 이런 성덕이 있을까?


나는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 앞에서 “네. 좋아요!”라고 답하지 못했다. 마음속으로야 이미 차를 타고 최애 옆에 앉아 냅다 강변북로를 달리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아르바이트가 마음에 걸렸다. 펑크 난 아르바이트 자리를 메워줄 사람도 없는데…. 찰나의 고민 끝에 나는 S에게 미안하다고, 일하러 가야 해서 드라이브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삼십 초 뒤, 그의 아쉬운 표정을 뒤로하고 눈을 떴다. 꿈이었다. 하아….

아직도 그 꿈에서 깼을 때의 허탈함이 생생히 기억난다. 로또급 행운을 포기하고 시급 8천 원을 받으러 떠난 멍청이. 그게 나였다. 딱히 성실하지도 않은 주제에, 꿈에서조차 일탈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어찌나 답답하던지.


‘갑자기 아파서 못 갈 것 같다고 했어야지!’ ‘집에 일이 생겨서 빨리 가봐야 한다고 말하면 됐잖아?’ ‘아니면 그냥 그만두겠다고 하던가!’


뒤늦게 떠오른 서른 가지 핑계를 읊조리며 융통성 없는 나에게 마음속으로 마구 잔소리를 퍼부었다. 


사실 현실은 꿈보다 한 수 위였다. 학교 다닐 때 나는 누구나 흔히 할 법한 조그만 일탈도 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같은 반 아이들이 입학하자마자 교복 치마를 줄일 때, 혼자만 졸업할 때까지 치렁치렁한 치마를 입고 다녔다. 방학이라고 염색이며 펌을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고지식하게 앞머리 없는 귀 밑 3센티미터 단발을 유지하기도 했다.


그랬으니 가출을 한다거나 엄마 아빠에게 심하게 반항하는 일 따위는 당연히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말 잘 듣는 착한 딸이었던 것도 아니다.)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서 배웠던 ‘질풍노도의 시기’는 나에게 해당 사항이 없는 듯했다. 그렇게 나의 학창 시절은 누구나 겪는다는 사춘기 한 번 없이 흐릿하게 지나갔다.


그때부터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여전히 내 인생엔 일탈이라 부를 만한 사건이 거의 없다. 일상은 늘 산골짜기에서 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잔잔하다. 한때, 나는 이런 삶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TV에 나오는 사람들, 아니 당장 내 주변의 친구들만 봐도 일탈의 경험을 한 번씩은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은 알게 모르게 그들의 삶에 자양분이 돼주었다. 적어도 여러 명이 모였을 때 영웅담처럼 꺼낼 에피소드 정도는 됐다. 저마다의 폭풍우나 격랑을 겪고 한층 단단해진 그들의 모습을 볼 때면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시시한 걸까, 자괴감이 들 때도 있었다. 썩 내키진 않지만, 일부러라도 일탈을 해봐야 하는 걸까? 바보 같은 생각으로 고민하기도 했다.


시시하고 보잘것없다고 여겼던 내 인생을 돌아보게 된 건 엉뚱하게도 유재석 덕분이었다. 집에서 빈둥거리던 어느 날, 우연히 유재석이 진행하는 한 TV 프로그램을 보게 됐는데 그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대충) 이런 말을 했다.


“많은 분들이 제가 술도 안 마시고, 운동만 하며 사는 게 답답하진 않느냐고 물으시는데요. 저는 술을 잘 못해서 술 마시는 게 오히려 고역이에요. 참는 게 아닙니다. 저한텐 운동하는 게 술 마시는 것보다 재미있어요.”


국민 MC로 수십 년을 일탈 없이 바르게만 사는 그가 남들 눈에는 답답하게 보였을지 모른다. 이런 세간의 시선에 유재석이 내놓은 답변이 내겐 이렇게 들렸다.


“일탈? 그냥 그거 내 취향이 아니라서 안 하는 것뿐인데?”


역시, 유느님! 일탈이나 질풍노도의 시기가 누군가의 인생에선 필수 요건이 아닐 수도 있다. 일탈만이 인생을 재미있게 만들어주거나, 성장시키는 요소는 아닐 테다. 그 말은 즉, 일탈 없는 내 삶이 재미없거나 시시한 삶과 동의어가 아니란 뜻이다. 스스로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나도 내 나름대로 재미와 성장을 겪으며 삶을 일궈왔을 거다. 그러니 이제 일탈에 대한 환상은 묻어둘 생각이다. 그 대신 유느님의 ‘운동’처럼, 일탈보다 내 취향에 더 잘 맞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탐구해봐야겠다. 애석하게도 그게 운동은 아닐 것 같지만.





추천사

사는 게 피곤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꾸만 다짐하는 특징이 있다. 다음에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지, 내일은 이렇게 말해봐야지, 라고. 마음을 자꾸 가다듬는다는 건 실수를 곱씹는단 뜻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픈 사람만이 습관적으로 후회하니까. 이들은 타인의 장점은 쉽게 찾아내면서 자신에겐 엄격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초라하다고 느끼기 쉽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이 책은 스스로를 소심하고 줏대 없다고 평가하는 저자가 그런 자신과 잘 지낼 수 있는 삶의 방식들을 찾아본 결과다. 서재경 작가가 이어가는 이런저런 다짐들은 잘 살고 싶은 마음에 오늘은 피곤했으니, 내일은 좋아질 거라는 다독임으로도 읽힌다. 작심삼일이 취미고 실망하는 게 특기이며 스스로를 애매하다고 생각하는 이에게 특히 추천한다.

- 정문정(작가, 《더 좋은 곳으로 가자》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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