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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재경 Sep 02. 2022

구교환도 2학기 반장이 딱이라고 했다

대단할 필요 없어, 아무것도 아니지만 말자


초등학교 때 나는 부반장만 하는 애였다. 그것도 꼭 2학기 부반장만. 반장 선거의 역학 관계에 따르면 1학기 반장과 부반장은 보통 학기 초부터 눈에 띄는 애들이 도맡는다. 활발한 성격으로 분위기를 주도하거나 공부를 잘하거나 인기가 많거나 혹은 셋 다 해당되는 친구들 말이다. 1학기 반장은 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존재라는 걸 증명하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아직 관계가 덜 여문 반 친구들을 이끌어야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게다가 아직 반 아이들의 이름을 미처 익히지 못한 선생님의 심부름꾼 역할도 해야 해서 은근 품이 많이 들었다.


2학기 반장은 처음부터 눈에 띄는 타입은 아니지만 볼수록 두각을 나타내는 친구들의 몫이 되었다. (알고 보니) 활발한 성격으로 분위기를 주도하거나 (알고 보니) 공부를 잘하거나 (알고 보니) 인기가 많은 그런 애들. 이제는 친해질 대로 친해져 한껏 시끄러워진 반 친구들에게 큰 목소리로 “조용히 하자!”를 외치는 것이 2학기 반장의 주요 임무였다. 업무량을 적확하게 비교할 수는 없지만 1학기 반장보다는 확실히 성대 쓸 일이 많은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대망의 2학기 부반장은? 앞서 소개한 요직들과 달리 대단히 특출난 점은 없지만, 그런대로 평판이 나쁘지 않은 애라면 그럭저럭 당선이 가능했다. 이를테면 나 같은. 게다가 다른 임원직과 달리 시기상, 역할상 비교적 할일이 적었다. 학기 초도 아니고 반장도 아니니까. 즉, 임원이기는 한데 화려한 스펙 없이도 비벼(?)볼 수 있으면서 의외로 한직인 자리가 바로 ‘2학기 부반장’인 것이다.


어린 서재경은 영악하게도 이 가성비 넘치는 임원직의 속성을 간파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왜 늘 반장 선거가 아닌 부반장 선거에만 나가는지 궁금해진 엄마가 하루는 그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워낙 오래된 일이라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엄마의 증언에 따르면 내 대답은 이랬다.


“반장은 너무 힘드니까.”


그렇다. 나는 그 어린 나이에도 ‘힘들까 봐’ 제1 권력은 포기하고 제3 또는 제4 권력을 고르는 아이였던 거다. 이걸 권력욕이 있다고 해야 할지 없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무튼 어린 시절의 나는 그랬다. 내 그릇이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꿰뚫고 있었던 그때의 나… 칭찬해.


나이를 먹을수록 2학기 부반장만을 고집하던 뚝심과 소신은 어디 가고 자주 갈팡질팡한다. ‘잘 사는 게 뭘까?’를 고민하며 방향을 잃을 때가 많아진 거다. 얼마 전에는 유튜브에서 경매로 집 산 20대를 보며 ‘나도 부동산 공부나 해볼까. 어느덧 서른 중반이 다 되어가는데 집이 없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을 했다. 최연소 임원이라는 어느 30대의 기사를 본 날에는 ‘역시 사람은 본업을 열심히 해야지. 회사에서 인정받고 자리 잡는 게 중요해.’라고 목표를 바꿨다. 그러다 잠들기 전에 내 또래 작가가 쓴 책을 읽으며 ‘나도 이런 글 쓰고 싶다. 이런 역작 하나 남기는 게 잘 사는 삶인 것 같아.’라고 또 다른 결론을 내려버리는 거다.


이 갈팡질팡의 굴레를 반복하다 보면 조급해지기 시작한다. 지금쯤이면 뭐라도 되어 있어야 하는데, 아직 뭣도 아닌 나를 견디기 힘든 순간이 자꾸만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2학기 부반장을 고집하던 예전의 나를 자주 소환하게 된다. 뭔가 되어야 할 것 같다는 압박감에 시달릴 때 초등학생 서재경의 ‘2학기 부반장론’을 떠올리는 거다. 그러면 ‘아주 대단한 사람이 될 필요 없다. 그냥 아무도 아니지만 말자.’라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다.


잊고 있었다. 최고가 꿈이 아닌 사람도 있다는 걸. 1등이 목표가 아닌 사람도 있다는 걸. 그런데도 나는 종종 다른 사람들이 1등을 향해 달리니까 나도 그 방향을 향해 뛰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내 자신이 아주 많은 양의 내용물을 담아낼 그릇이 아니라는 걸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는데도. (더 정확히 말하면 많은 양의 내용물을 담아낼 생각 자체가 없는 그릇에 가깝다.)


결국 중요한 건 잘 사는 게 아니라 나답게 사는 거니까 나는 앞으로도 쭉 2학기 부반장 정도의 꿈과 목표를 갖고 살아가 볼 참이다. 뭐, 누군가는 2학기 부반장도 대단한 거 아니냐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나는 2학기 부반장쯤은 꼭 하고 싶다. 왜냐면 나는 권력욕 없는 애 중에 제일 권력욕 많은 애니까. (뭐 안 되면 미화부장이나 환경부장이라도.)


p.s. 이 글을 쓰고 나서 얼마 뒤 구교환 배우가 TV에 나와 본인은 ‘2학기 반장형’이라고 인터뷰한 내용을 봤다. 1학기 때 캐릭터를 쌓아 2학기 때 반장이 되는 타입이었다고. 그분도 MBTI가 나와 같은 INFP던데. 아무래도 MBTI는 과학인 것 같다. (농담!)





추천사

사는 게 피곤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꾸만 다짐하는 특징이 있다. 다음에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지, 내일은 이렇게 말해봐야지, 라고. 마음을 자꾸 가다듬는다는 건 실수를 곱씹는단 뜻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픈 사람만이 습관적으로 후회하니까. 이들은 타인의 장점은 쉽게 찾아내면서 자신에겐 엄격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초라하다고 느끼기 쉽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이 책은 스스로를 소심하고 줏대 없다고 평가하는 저자가 그런 자신과 잘 지낼 수 있는 삶의 방식들을 찾아본 결과다. 서재경 작가가 이어가는 이런저런 다짐들은 잘 살고 싶은 마음에 오늘은 피곤했으니, 내일은 좋아질 거라는 다독임으로도 읽힌다. 작심삼일이 취미고 실망하는 게 특기이며 스스로를 애매하다고 생각하는 이에게 특히 추천한다.

- 정문정(작가, 《더 좋은 곳으로 가자》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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