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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재경 Sep 06. 2022

울 엄마가 그랬다, 내 장점은 포기를 잘하는 거라고!


발레, 스케이트, 플루트, 수영, 미술, 피아노. 어렸을 때 학원을 참 많이 다녔다. 다른 말로 하면 한 학원을 끈기 있게 다니는 스타일이 아니었다는 거다. 다니다가 한계에 부딪히거나 흥미를 잃는 순간, 나는 가차 없이 학원을 그만뒀다. 발레는 다리가 도저히 안 찢어져서, 피아노는 화성법 이론이 당최 이해가 되지를 않아서, 스케이트는 빙판에서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는 게 너무 무서워서… 배우기를 포기하는 이유도 갖가지였다. 그나마 가장 오래 배운 게 수영인데, 이마저도 다니다 말다를 반복하는 바람에 초급반과 중급반 언저리를 맴돌았다.나의 끈기는 고급반에 올라갈 때까지 기다려주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공백이 긴) 10여 년의 수영 경력에도 불구하고 접영을 잘하지 못한다. 함께 수영장에 놀러 갔던 친구들이 내가 접영 하는 모습을 보고 “허우적대는 것 같아.”라며 놀려댔을 정도다.


나를 이렇게 ‘학원 잘 그만두는 애’로 키운 건 우리 엄마다. 나는 엄마에게 옛날 얘기 듣는 걸 좋아해서 함께 수다를 떠는 밤이면 백번도 더 들었을 어릴 적 에피소드를 묻고 또 물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빠뜨리지 않고 들려주는 얘기가 ‘유치원 신발장’ 에피소드다.


엄마는 유치원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항상 나를 데리러 오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가장 늦게 나오는 어린이였다고 한다. 왜 이렇게 천천히 나오는 거냐고 이유를 물으니, 일곱 살의 서재경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신발 신는 데가 너무 복잡해서 애들이 다 신고 나갈 때까지 기다렸어.”


어린 나는 번잡한 틈에 껴서 신발을 신느니 차라리 빨리 나가기를 포기해버리는 애였다. 엄마는 이 얘기를 끝마칠 때면 늘 감탄했다. 어쩜 어린애가 이렇게도 지혜로울 수 있느냐고. 그러면서 꼭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네 장점은 포기가 빠르다는 거야.”


나는 그 말이 웃겨서 깔깔대다가도 그게 무슨 장점이냐고 엄마를 장난스럽게 흘겨보고는 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포기가 빠른 나는 자라서도 포기가 빠른 어른이 됐다. 첫 회사에 어렵게 취직하고도 딱 3주 만에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졌다. 정말이지 치가 떨리도록 회사가 싫었다! 기분에 따라 시시각각 태도가 변하던 직속 상사와 야근 수당도 주지 않으면서 야근을 강요하던 팀장과 일하면서 나는 점점 시들어갔다. 무엇보다 그곳에서는 내 미래가 보이지 않았기에 결국 회사를 다닌 지 딱 1년 만에 퇴사했다. 내가 속한 팀이 사라지면서 권고사직을 당한 거긴 하지만 부당한 처사를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내가 포기한 것이기도 했다.


첫 회사를 나오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두 번째 회사에 입사했다. 평균 연령이 40대 후반은 족히 될 것 같은 잡지 회사의 막내 자리였다. 출근 첫날, 상사가 나에게 처음으로 한 말은 이랬다.


“아마 이 회사에서 별로 배워갈 건 없을 거야. 네가 알아서 잘해라.”


그리고 그 말은 그냥 겁주는 말이 아닌 진짜였다. 조직 내 누구도 새로운 것에 도전하거나, 관행을 바꿔보려 하지 않았다. 모두가 열심히 해봤자 힘만 빠질 뿐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 힘도 없는 신입 사원이었던 나는 그냥 함께 고인 물로 흘러드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업무 강도는 결코 낮지 않아서 새벽까지 야근하는 날이 잦았다.


한번은 올림픽 시즌인데 아무도 올림픽 특집 기사를 기획하지 않는 걸 보고 내가 덥석 자원을 했다. 그리고 지옥을 맛봤다. 나 혼자 평창에 취재를 다녀와서 여덟 페이지짜리 르포 기사를 쓰게 된 거다. (그 기사는 그 달 내가 써야 하는 열 몇 개의 기사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틀간 퇴근도 못 하고 회사에서 ‘졸다 기사 쓰다, 졸다 기사 쓰다’를 반복한 끝에야 겨우 마감을 했다. 형편없는 퀄리티의 기사를 지면에 내보내고 나서 생각했다. 이 회사를 계속 다니다가는 제대로 된 기사도 못 써보고 고인 물이 되거나 과로로 죽겠다고. 그길로 나는 다른 회사에 지원해, 도망치듯 이직을 했다. 나를 챙겨준 몇몇 좋은 선배들만 아니었다면, 아마 더 일찍 그 회사를 박차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3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회사를 세 번이나 옮겨 다녔다. 오죽하면 내 친구들은 나에게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직 열 번 채워서 책 쓰는 게 어떻겠냐며 만날 때마다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지금 다니는 세 번째 회사에서 만 4년을 채우는 중이다.


회사라는 곳의 특성이 원래 ‘가기 싫다’를 연발하게 하기에, 지금 회사를 다니면서도 가끔은 (사실은 자주) 출근하기 싫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나는 지난 포기의 결과로 확실히 이전 회사보다는 나은 곳에서 일하게 됐다. 배울 점이 있는 상사와 새로운 것에 부지런히 도전하는 동료들이 언제나 곁에 있는 회사로 말이다. 지난날의 빠른 포기로 나는 과거에 내가 있던 곳보다 훨씬 마음에 드는 곳으로 나를 데려올 수 있었다. 포기가 내게 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를 더 좋은 곳으로 데려갈 의무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포기는 무언가를 그만두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별로인 것에서 나를 보호하는 과정이기도 하기에. 만약 어린 시절의 내가 발레, 피아노, 스케이트를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배웠더라면 어느 정도 실력이 향상되기는 했겠지만, ‘재능 없음’을 탓하며 꽤 오랜 시간 주눅 들어 있었을지 모른다. 그게 나의 성격으로 남았을 수도 있고. 첫 회사와 두 번째 회사에서 퇴사하지 않았더라면, 장기근속 사원(?)은 됐겠지만 내가 하는 일에서 그 어떤 흥미나 자부심은 느끼지 못했을 거다. 포기의 과정을 통해 괜찮은 오늘을 만들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엄마의 말이 맞았다. 내 장점은 포기를 잘하는 거다! 나는 내 인생에서 포기를 자주 꺼내 쓸 줄 아는 내가 좀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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