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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라이어티삶 Jul 13. 2022

만년필 리추얼이 퇴근 후에 주는 만족감이란

손이 계속 갈 수밖에 없는, 그럴수록 '정'이 쌓이는 너

Visconti 사의 Wallstreet라는 제품을 쓰고 있습니다. 라미 제품도 몇 개 갖고 있어요. 사실 만년필이라고 하면 좀 '있어 보이는' 아이템이라서, 'Wallstreet'는 첫 번째 책을 쓰고 난 다음 '책에 멋진 코멘트와 사인을 하는 멋진 도구'로 사용하려고 장만했었습니다. 


하지만, 책에 사인을 마구마구 해 줄 정도로 책이 팔리지는 않았고, 그래서 많이 쓰지 못했던 아픔이 있어요. 게다가 펜촉도 부드러운 'F'라서, 필기를 한다거나, 미팅 중에 메모를 한다거나 하기에 적절하진 않더라고요.


서랍에 처박아두던 만년필을 다시 찾아 꺼낸 건, 두 번째 책 '생존 다이어트'를 출간한 다음이었습니다. 운 좋게 교보 건강 부문 베스트셀러로 잠깐 올라가기도 했었죠. 이 책에 사인을 하면 되겠다!!! 싶어서 다시 찾았습니다. 제 'Wallstreet'를 꺼내서 아내와 아버지께 선물하려고 내지에 서명을 했습니다. 


아뿔싸... 코팅된 반질반질한 종이라 만년필 잉크가 스며들지를 못하네요. 그래서 결국 책에는 네임펜, 매직펜으로 서명들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역시 만년필 관점에서는 아픔이네요.


그렇게 또 한동안 봉인되어 있던 만년필을 최근에 꺼내서 끄적이고 있습니다. 어느샌가 리추얼처럼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만년필은, 아시다시피 잉크를 충전해줘야 쓸 수 있습니다. 카트리지를 꽂아 쓸 수도 있지만, 저는 그건 진정한 '맛'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계속 잉크를 채워서 쓰고 있어요.


회의에 들어갈 때도, 들고 들어가서 미팅의 키워드들을 노트에 끄적입니다. 미팅 내용 중 중요한 것들을 남기는 '일'인데, 만년필로 쓰면 글자를 그리는 재미란 게 생깁니다. 신기하더라고요. 또, 제가 매일매일 기록하는 플래너에도 하루를 돌아보는 회고, 다음 한 주를 세팅하는 플래닝 등을 할 때 볼펜이 아니라 만년필을 쓰게 되었습니다. F촉이라 글이 뭉개지는 것도 손에 힘을 덜 주고, 알아보기 쉽게 쓰는 정도를 익혔네요.

사진을 찍으려 설정샷을 만든 거지만, 저기 저 글씨의 잉크가 스며들고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만년필을 쓰려면, 서두르면 안 됩니다. 빨리 스며드는 종이는 번지기 마련이고, 천천히 스며드는 종이는 쓰인 글자가 말라서 단단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더라고요. 급해서 만지면 손에 묻어서 보기가 미워집니다. 그래서 만년필로 글자를 그리면 기다려야 합니다. 


저는 이런 기다리는 시간이 좋아지더라고요.

실시간으로 자료를 공유하고, 메신저에 바로바로 답하고, 뭐든 즉각 즉각 처리하는 리듬에 하루를 보낸 후에, 조용히 거실에서 플래너에 만년필로 몇 줄 끄적이고 잉크가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그 시간이 좋아졌습니다.


이렇게 잉크를 충전시키고 나면, 물티슈 몇 장을 써서 닦아주고 정리해야 하는 귀찮음이 생깁니다. 하지만, 그런 건 정이 쌓인다고 해야 할까요?

하루 종일 미팅에 오가며 들고 다닌 만년필의 잉크는 이틀 정도면 동이 납니다. 잉크가 말라버린 만년필의 필기감은 정말 별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 잉크를 충전합니다. 


여러 색상의 잉크를 갖고 있어요. 그래 봤자 예닐곱 색상인데, 그걸 두고 '이번에는 어떤 색을 충전할까?'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참 즐겁더라고요.


위에 사진을 찍으려고 잉크병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아내가

잉크 색깔 뭐할지 보고 있어? 

하네요. 이해를 받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아, 이것도 저만의 팁? 같은 건데 알려드릴게요.

저는 잉크를 완전히 비우고 씻어내지는 않아요.

다른 색상의 잉크와 섞이는 그 비율에 따라서 매번 색깔이 달라지는 그런 재미도 있어서, 그것도 즐기고 있습니다. 


직전에는 청록색(터키쉬 그린)이었는데, 거기에 네이비를 섞었더니, 너무 짙네요.

또 열심히 펜을 써서, 빨리 다른 잉크로 충전하는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이상, 제가 며칠에 한 번씩 갖는 만년필 리추얼을 알려드렸습니다. 

손으로 쓰는 재미, 그건 확실히 다른 즐거움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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