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자체보다 그 시스템에 주목하다
한국의 마지막 왕조인 조선은 1910년 8월 29일에 일본에 강제 병합되면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조선왕조의 역사를 놀라울 만큼 자세하게 알 수 있다. 그 핵심 이유가 바로 조선왕조실록이다.
(사진)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왕조의 공식 사서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이 사서의 각 편은 왕이 죽은 뒤에 공식적으로 편찬되었다. 기록의 객관성을 따져 보면,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의 “감독” 하에 작성된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보통 공식 기록에서 제외한다. 마지막 두 왕인 고종과 순종은 한일 병합 이후에 사망했고, 이미 조선이 사라진 뒤에야 실록이 편찬되었다. 다만 두 왕은 근현대의 인물이기 때문에 실록 외에도 우리가 참고할 만한 기록이 충분히 많이 있고, 사진까지 남아 있다.
(사진) 조선의 마지막 두 왕인 고종과 순종. 이 둘의 실록은 정식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조선왕조실록은 전 세계의 다른 여러 기록물과 비교해도 독특한 특징을 가진다. 그 가운데 특히 두 가지를 분산 원장(블록체인의 기초 원리)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이 사서를 특별하게 만드는 첫 번째 특징은, 왕조차도 실록을 수정하는 것은 물론 열람하는 것조차 금기였다는 점이다. 기록의 객관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사관들은 이를 일종의 사명처럼 여기고 때로는 목숨을 걸고 기록을 남겼다. 기록의 객관성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가 태종 4년(1404) 2월 8일의 기록이다. 사관은 왕이 “기록하지 말라”고 한 말조차 그대로 적어 넣었다.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
출처: 조선왕조실록
이 정도면 실록은 사실상 write-only 로그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물론 ‘절대’라는 것은 없다. 일부 왕은 기록을 열람하거나 수정하려 했다. 예외적인 경우에도 열람은 왕이 직접 보는 방식이 아니라, 신하를 시켜 특정 부분만 골라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조선의 10대 왕 연산군 때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고, 그 기록을 본 왕이 격분하면서 이후에 피바람이 불었다.
수정도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기존 내용을 지우고 덮어쓰는 방식이 아니라, 수정본을 추가로 붙이는 형식이었다. 즉 append 방식이고, 블록체인에 비유하면 기존 블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중간부터 새로운 체인을 만드는 하드포크에 가까운 행위다. 조선이 다른 것은 몰라도 기록 하나만큼은 집요하다고 할 정도로 철저했다.
두 번째 특별함은 분산 저장이다. 조선 4대 국왕이자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때부터 실록은 서울 외에 세 곳(전주, 성주, 충주)에 추가로 인쇄해 보관하도록 했다. 이 특성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을 한국 최초의 분산(distributed) 원장(ledger) 시스템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분산 저장 구조 덕분에 실록은 조선이 겪은 치명적인 두 전쟁 속에서도 완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특히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부산 상륙에서 서울 함락까지 단 20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침략 경로에 네 곳의 보관소 가운데 세 곳(성주, 충주, 서울)이 위치해 있어서, 이 세 곳의 실록은 거의 동시에 불타 버렸다. 평소에는 다소 과해 보일 수 있는 “네 곳 분산 저장”이 실제 전쟁 상황에서는 겨우 한 곳만 남기는 수준이 된 셈이다. 만약, 불패의 명장 이순신 장군이 전라도를 사수하지 못했다면 전주에 보관되었던 마지막 실록마저 사라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진) 임진왜란당시 조선왕조실록의 4곳의 서고 위치.
임진왜란 이후 대부분 서고의 소실을 겪은 조선은 다시 한 번 시스템 업데이트를 진행한다. 이번에는 방어에 취약한 주요 대도시가 아니라 섬(강화도)과 3개의 깊은 산속으로 서고를 옮긴다. 보관 장소의 수(4곳 → 5곳), 그리고 보관지형의 탈중앙화(도시 → 도시, 섬, 산)도 업그레이드가 되었다. 1627년 병자호란의 청나라의 대규모 공격에 수도의 서고와 섬의 서고는 불탔지만 산속의 서고는 청나라 군이 닿지 않아 조선왕조실록은 온전히 보전되었다. 한국에는 조선왕조실록 외에도 그 이전의 고려사를 비롯해 다양한 사서가 존재했다. 혹은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 세계의 수많은 과거의 역사서가 마찬가지로 존재했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이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이 기록이 비교적 최근의 것이라서가 아니라, 강한 복원력을 가진 분산 원장 시스템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록의 객관성까지 함께 고려하면, 조선왕조실록은 내용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기록이지만, 이런 시스템을 설계하고 수백 년 동안 운영했다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 그야말로 한국의 자랑스러운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