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려놓음'에 대해 배우고 있다.
사실 철이 들고 나서 뜻대로 안 되는 삶의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매번 굳은 의지를 다져 보지만 막상 '내려놓음'은 늘 어렵다. 아마 어려웠던 환경을 극복하려 노력해 온 태도와 습관, 노력을 통해 일구어낸 작은 성취의 경험들이 역으로 내려놓음을 방해하는 큰 요인인 것 같다.
개천에서 간혹 가다 용이 나기도 하던 시절에는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며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들의 성공 신화를 다룬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노력의 과실을 크게 맛본 사람일수록 '내려놓음'을 포기로 오인하기 쉽다.
누구에게나 삶은 내려놓음의 연속이다.
당장 한참 봄을 알리던 아름다운 벚꽃과도 이별했고 중년에 접어들며 싱그러운 젊음과도, 무쇠 같던 건강과도 서서히 이별의 시동을 걸고 있는 중이다. 또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과도 이별해야 하는 운명에 놓인 우리들이다. 그렇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강제적' 내려놓음은 마지막 종착지인 나 자신과도 이별하며 '죽음'을 통해 완결된다.
하지만 어리석음 때문인지, 아직은 크게 아픈 곳 없이 말짱히 살아있는 덕분인지 '내려놓음'은 쉽지 않다.
내가 좀 더 노력했다면 상황이 호전되지 않았을까라는 자책과 일말의 희망이 내려놓음을 방해한다.
내려놓음에서도 희망은 '고문'이 된다. 또 희망하며 애써온 내 노력이 아까워 내려놓지 못하고 전전긍긍 아파한다.
노력을 폄하하고 노력하는 태도가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다.
환경만 탓하고 노력조차 안 한다면 원하는 목표를 이룰 확률은 제로에 가깝기에 노력이라도 죽어라 해보는 편이 훨씬 낫다. 죽어라 노력했음에도 실패했다면 세상만사가 노력한다고 다 이루어지지 않음을 배우게 된다.
결국 중요한 건 내 힘으로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노력보다 우선되면 좋겠다.
특히, 인간관계는 '노력'이 통하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다.
나의 정성과 노력으로 상대를 감화해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교만함도 없다는 것을 그간의 인연을 통해 배웠다.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 함께 노력해도 관계를 회복하기 쉽지 않은 마당에 혼자만의 노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부터 어불성설이다.
관계가 엉망진창이 되어 도저히 속수무책인 지경에 이르렀다 판단이 된다면 '내려놓음'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간 쏟은 내 노력은 '내려놓음'을 배우기 위한 값비싼 수업료라고 생각하자.
내려놓음을 주제로 글의 서두가 이렇게 긴 것은 그만큼 내려놓음이 쉽지 않았음의 반증이다.
홀어머니 밑에서 일가친척 교류 없이 외롭게 살았던 내게 자매들은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혈육이었다. 그중 한 살 터울인 언니와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맞지 않아(물론 일방적으로 당하는 입장이었지만) 일정 거리를 두고 지내왔지만 그래도 큰일이 생길 때마다 서로 도우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런저런 일로 관계가 틀어질 때마다 언니는 내게 '인연 끊자'는 말을 욕 대신 종종 던졌다. 그때마다 서운함이 들었지만 언니의 상처를 이해하고 먼저 사과해 마음을 풀어주곤 했다.
언니 말마따나 인연을 끊었다면 벌써 단절되었을 관계지만 그래도 이제껏 인연을 이어온 대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첫째, 피를 나눈 혈육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가족이기에 끊으래야 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둘째 삶의 마지막 순간에 더 많이 사랑하며 살지 못했음을 후회하거나 용서하지 못한 사람을 남겨두는 게 싫었다. 셋째, 방황하는 엄마를 대신해 어린 나이부터 살림을 도맡았던 언니의 희생이 고마웠고 그 상처가 흉터가 되어 분노를 안고 사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넷째, 모든 관계는 상대적이라는 원칙하에 나의 부족함을 반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생각들을 내려놓기로 했다.
누구라도 설령 가족일지라도 지속적으로 나를 아프게 한다면 거리를 두고 사는 게 맞다.
또 삶의 마지막 순간에 타인뿐 아니라 나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하지 못했음을 후회하는 것도 싫다.
언니의 희생이 고맙지만 그 희생을 대가로 가족을 향한 무차별적 공격을 퍼붓는 건 옳지 않다.
마지막으로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지만, 상대방 또한 완벽하지 않음을 깨닫지 않는다면 관계의 긍정적 변화는 요원하기 때문이다.
가깝고 소중했던 사람만이 나의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정서적 거리가 먼 사람은 나의 세계에 어떠한 파장도 미치지 못한다.
가족이라는 특별한 인연으로 만난 언니와의 관계를 통해 '내려놓음'의 지혜와 나를 지키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