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본토도 남국 느낌 물씬 풍기며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여주지만, 오키나와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선 역시 주변 섬들을 가봐야 한다. 오키나와 주변 섬들 중에선 이리오모테지마(西表島)나 이시가키지마(石垣島), 미야코지마(宮古島)가 단연 유명하지만, 로컬 여행 덕후는 규모가 작을수록, 남들이 안 가본 곳일수록 여행 욕구가 샘솟기 때문에 구메지마(久米島)를 목적지로 정했다.
구메지마까지는 오키나와 본토에서 비행기로 30분. 시도 때도 없이 비행기를 타야 하는 숙명이지만 여전히 긴장되는 그대... 여행 시작부터 내 인생 첫 소형기에 도전해야 하는 압박감이 있었다. 여행은 늘 새로운 도전의 연속. 그래도 멋진 풍경을 눈에 담고 소중한 추억을 만들기 위해선 이쯤이야.
사실 오키나와에 오기 직전까지 같은 시기에 태풍이 상륙한다는 예보 때문에 여행을 취소할 뻔했다. 여행이 엎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50프로 정도 가지고 출발했는데 정말 다행히도 태풍이 천천히 움직여주는 바람에 구메지마로 향할 수 있었다.
예정대로 출발했다는 안도감과 상반되게 이륙과 동시에 내 몸의 긴장 세포들이 풀가동한다. 비행기도 잘 못 타면서 여행 좋아하는 내가 나도 가끔은 신기하다. 뭐든 쉽게 얻어지는 것보다 힘듦을 감수하고 얻는 것이 더 기억에 많이 남기 때문인 걸까. 그래도 바다에 떠 있는 섬들을 바라보니 곧 구메지마에 도착한다는 기대감이 부풀어 오기 시작했다.
KUMEJIMA 도착!
오키나와의 마스코트, 사자같이 생긴 전설 속 동물 시사(シーサー)가 반겨준다. 구메지마에서도 차를 빌릴 수는 있지만 섬이 워낙 작기 때문에, 모처럼 유유히 흐르는 섬의 시간을 자동차의 스피디함으로 덮어버리긴 아까웠다. 그래서 렌털 자전거와 버스, 그리고 택시를 유용하게 이용하기로 했다.
숙소가 있는 바닷가 근처는 공항에서 다소 거리가 있기 때문에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외지에서 온 관광객을 친절하게 맞아주신 택시 아저씨. 이동하는 내내 지루하지 말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워낙 사투리가 심하셔서 거의 못 알아들었다. 아저씨, 죄송해요.
호텔에 짐을 맡기고 반나절 우리의 발이 되어줄 자전거를 빌렸다. 자전거는 호텔 프런트에서 바로 빌릴 수 있었기 때문에 렌털 숍을 찾아다닐 수고를 덜 수 있었다. 또, 친절하게도 호텔 직원이 자전거 타다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해서 낯선 섬에서 안심하고 움직일 수 있었다. 근데, 너무 안심한 탓이었을까, 이후 자전거를 타다 지옥을 보게 되는 경험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반전주의)
자전거 산책을 나서기에 앞서, 섬에 왔으니 우선 바닷가로 향했다. 숙소에서 한 3분 걸었을 뿐인데 무심한 듯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에메랄드빛 바다라니...여기서 그냥 한 반나절 아무것도 안 하면서 있고 싶어라.
마음을 바다로 가득 채우고 자전거 산책 출발. 섬의 규모는 작지만 업 다운이 심하기 때문에 일주까지는 어렵고 언덕 넘어 맛보기로 사이클링을 하기로 했다.
약간 먹구름이 의심스러웠는데 아니나 다를까 스콜이 퍼부었다. 제대로 남쪽 섬 인증해주심. 쫄딱 젖은 채로 잠깐 동네 건물에서 비를 피했다. 자판기에서 음료 하나 사 먹으니까 스콜답게 바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라졌다. 오키나와 꽃 하면 떠올리는 '히비스커스' 너도 흠뻑 젖었구나. 목 좀 축이고 꽃구경하다 보니 하늘이 맑아졌다. 다시 출발해볼까.
오키나와 하면 사탕수수밭이지.
오키나와 하면 돌담이지.
섬의 소박한 일상 풍경을 눈에 담느라, 비 쫄딱 맞고 여태껏 경험해본 적 없는 무더위 속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산언덕을 힘겹게 오르는데 갑자기 몸의 이상을 감지했다. 이상해... 숨이 제대로 안 쉬어져...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토할 것 같아...평소에 좀만 움직이면 바로 '힘들어, 안 해'라며 투정 부려왔기 때문에 남편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이 언덕길에서 인생 처음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그제야 내가 들고 있던 이온 음료수를 확인한 남편은 왜 이렇게 많이 남았냐며, 여태껏 뭐 마신 거냐며 당황해했다. 그래 맞다, 수분 보충을 제대로 안 한 것이다. 스콜이 지나간 후 갑자기 과도하게 더워진 데다가 워낙 땀을 잘 못 흘리는 나의 체질이 더블 콤보되면서 말로만 듣던 온열 증상이 나타났다. 정말 농담 쏙 빼고 이러다 죽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근데 또 그 와중에 여기까지 왔는데 기대했던 사이클링을 도중에 그만둬야 한다는 게 너무 서러워서 정신력으로 어떻게든 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의 저질 체력으로 인해 여행을 망친 전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계획대로 보내고 싶었다.
40분 정도 쉬었을까. 상태가 좀 나아져서 자전거 끌면서 천천히 언덕을 넘었다. 내리막길에 다다르니 내 몸 상태를 비웃기라도 하듯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근데 이 와중에 풍경은 왜 이렇게 이쁘고 난리인지. 언덕에서 그대로 왔던 길로 돌아갔다면 못 봤을 풍경. 좀 전의 고통을 보상이라도 해주듯 잊지 못할 그림을 선물해줬다.
짧지만 임팩트 강했던 자전거 산책은 소키 소바로 마무리. 소키 소바는 돼지갈비가 들어간 온(溫) 소바이다. '소키'는 빗을 뜻하는 말의 방언인데, 돼지갈비뼈가 빗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무더운 남쪽 지방의 더위를 가시게 해 줄 이열치열 음식이다.
그러나, 열사병은 그리 만만한 놈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풍경 보면서 좀 괜찮아졌다고 싶었는데, 에어컨 빵빵 나오는 가게에 들어오니 이번엔 오한이 밀려왔다. 아니 이 무더위에 오한이라니... 결국 내가 시킨 소키 소바는 남편이 대신 먹다가 그대로 빠이빠이. 열사병의 후유증은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