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는 되도록 섬에 가보려고 한다. 일본이 섬나라다 보니 워낙 가보지 못한 섬이 많기도 하고 단순히 여름 바다를 맘껏 즐기고 싶기 때문이다. 또, 최대한 일상에서 벗어나 단 며칠만큼이라도 섬 시간으로 천천히 지내보고 싶기 때문이다. 여행을 하려고 하면 여기도 가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먹고 등등 욕심내기 마련인데 계획 잡고 고민하다 보면 여행을 가기도 전에, 혹은 여행지에서 지쳐버린다. 물론 그런 여행도 끝나고 돌아보면 추억이 많이 남지만, 가끔은 공간을 한정 지어버리면 오히려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게 되서 좋다. 우유부단, 결정 장애가 있는 우리 부부에게는 복잡한 고민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어서 섬이 참 좋다. 있는 만큼 즐기고 그 안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는 여행. 우리에게 섬 여행이 딱 그렇다.
일본에 섬이 워낙 많다 보니 한 번씩만 가봐도 평생 다 가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지만, 그중에는 몇 번씩이나 발길을 옮기게 되는 섬도 있다. 좋은 영화는 다시 보고 싶고, 좋은 책은 두 번 이상 읽고 싶은 우리 부부는 여행지도 좋은 곳은 몇 번을 다시 가보고 싶다. 일본 본토와 시코쿠 사이에 떠있는 작은 섬, 쇼도시마섬(小豆島)이 우리에겐 그런 곳이다.
쇼도시마섬으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시코쿠의 가가와현에 속한 섬이다 보니 가가와현에서 배로 들어가는 게 일반적이다. 우리는 부득이하게 중간 지점에서 만나서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고베의 히메지항에서 쇼도시마섬행 배를 타기로 했다. 히메지역에서 항구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좀처럼 오지 않아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니 옆에서 우리처럼 버스를 기다리던 부부가 같이 택시 타고 터미널까지 가지 않겠냐고 말을 걸어왔다.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같이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향하면서 짧은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쇼도시마섬 가는 도중에 있는 작은 섬으로 향한다는 젊은 부부는 여행이 아니라 취미 활동으로 매주 섬에 간다고 했다. 도시 사람들이 섬에 삼삼오오 모여서 지역 커뮤니티를 위한 게스트 하우스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좋아서 하는 일인데 매주 도시를 나와 섬에 가서 잠깐 지내다 오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다고 했다. 십분 남짓한 짧은 시간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부부의 표정에서 그들의 행복이 느껴졌다.
도시의 허물이 아직 갑옷처럼 단단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가볍게 하고 배에 몸을 실었다. 1시간 40분 남짓, 쇼도시마섬이 보이기 시작했다.
쇼도시마섬이 떠있는 세토내해는 일 년 내내 온난한 바다로 유명하다. 비와 눈의 영향을 많이 받는 태평양이나 동해에 비해 세토내해는 강수량도 적고 바다가 잔잔해서 이곳에 떠있는 섬들도 특유의 고요함과 잔잔함이 있다. 세토내해는 나오시마섬이나 테시마섬 등 섬을 하나의 미술관으로 만들어 현대 예술과 섬을 접목시킨 곳으로도 유명하다. 쇼도시마섬에도 곳곳에 현대 예술 작품이 설치되어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세토내해의 섬들 중에서 가장 섬 본연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인 것 같다.
이번 섬 여행도 여느 때처럼 뚜벅이이다. 항구에서 시내로 향하기 위해 버스에 올라탔다. 차를 빌리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편하지만 현지의 버스를 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외지인들을 위해 틈틈이 가이드를 해주시는 버스 기사님도 계시고, 마실 가셨다 귀가하시는 동네 어르신, 하교하는 아이들 등 버스 안에선 현지 사람들의 일상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고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올리브 공원이다. 쇼도시마섬은 일본에서 처음으로 올리브 재배를 시작한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10년 전, 일본 정부는 국내에 올리브 재배를 장려했고 시험 지역으로 선정된 곳 중 유일하게 쇼도시마섬에서 재배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쇼도시마섬하면 가장 먼저 올리브를 떠올릴 만큼 우수한 지역 브랜드로 자리매김하였다. 뿐만 아니라 올리브 재배 구역을 공원으로 조성하여 관광지로도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사방이 올리브 나무로 둘러싸인 공원. 올리브 나무 너머로 바라보는 세토내해의 잔잔한 바다가 평온함을 선물해준다. 쇼도시마섬에 왔다는 실감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순간이다. 단단했던 도시의 허물이 한 겹 벗겨진 듯하다.
빳빳하고 곧게 솟은 올리브 잎과 몽글몽글한 녹색 올리브. 올리브 아이스크림, 올리브 핸드로션 등등 다 좋지만 그래도 올리브 그대로 소금물에 절여서 먹는 게 가장 좋다. 식재료 본연의 맛을 따지는 거 보니 나도 나이가 조금 들었나 보다.
이 세상의 평화로움은 전부 이곳에 있는 듯한 푸근한 풍경. 그리스 풍차로 불리는 이 풍차는 쇼도시마섬과 자매도시인 그리스 미로스섬과의 우호의 증표로 설치되었다고 한다. 바다와 하늘의 푸른색과 풍차의 흰색의 대비가 발길을 머물게 만든다. 스마트폰도, 손목시계도 다 풀어두고 낮잠 한숨 청하고 싶지만, 현실은 내 뒤로 기념사진 찍으려는 관광객이 줄 서있기 때문에 마음에만 열심히 담고 공원을 내려왔다.
실험 정신이 투철하여 어떻게 하면 우리 집에서도 올리브 나무를 키울 수 있을까 고민하는 남편을 말리면서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간다. 시골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라도 있으면 감사한 정도기 때문에 섬에서는 버스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도 중요하다. 다만 기다릴 줄 아는 자에게는 멋진 바다 풍경을 선사해주기도 한다. 버스를 기다리며 쇼도시마섬의 잔잔한 바다를 바라본다. 도시의 허물이 한 겹 더 벗겨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