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쇼도시마섬을 갔을 때는 하루밖에 시간이 없어서 차로 바쁘게 움직였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는 2박 3일을 천천히 음미하고자 자전거로 돌아보기로 했다. 미리 자전거 대여샵을 알아보던 중에 흥미로운 가게 한 곳을 발견했다. 가게 홈페이지는 요즘은 거의 유물이 된, 막 인터넷이 보급됐을 당시의 손맛이 한껏 느껴지는 옛날 감성이었다. 언뜻 관리가 안되어 있을 것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주인아저씨가 꾸준히 업데이트를 해온 흔적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가게를 찾아준 손님들의 사진을 싣고 있는가 하면, 한편에는 자전거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벌꿀과 올리브 오일을 맛보는 손님들 사진, 주인아저씨가 어딘가 놀러 갔다온 사진 등등 번잡함 속에 나름의 규칙성이 느껴지는 홈페이지 구성이 재밌었다. 이런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아저씨라면 재밌는 사람임이 분명할 거라는 직감을 가지고 자전거를 빌리러 가게로 향했다.
넓지 않은 가게 안을 사진들이 빼곡히 채운 걸 보니 내 직감이 얼추 맞은 것 같았다. 일흔이 넘은 연세임에도 할아버지(아저씨가 아니었다)의 올곧은 자전거 사랑이 느껴진다. 외지에서 온 우리가 반가우셨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쇼도시마섬을 활성화하기 위해 지역 주민들과 고군분투하시는 이야기, 본인의 취미로 즐기시는 양봉 이야기 등등 이야기보따리가 무궁무진했다. 매 순간을 소중히 담아둔 할아버지의 사진들을 바라보자니 내 인생에는 여전히 욕심이 많은 것 같이 느껴졌다. 많은 걸 바라기보다 그저 자기가 놓인 환경 속에서 좋아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행동에 옮기는 것.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 인생을 즐긴다는 게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닌데 자꾸 지나온 길만 돌아보고 보이지 않는 길을 두려워하는 지금의 내가 한없이 작게만 느껴졌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기에 몽글몽글한 감성은 이만 여기서 접고 슬슬 출발했다.
산세가 험하지 않은 바닷길을 따라 반나절 둘러보기로 했다. 1년 전 여름휴가 때 오키나와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온열 증상으로 고생했던 걸 교훈 삼아 이번에는 덜 힘든 전동 자전거로 정했다. 조금 달리다 보니 바다가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자동차를 타다 보면 지나치기 쉬운 풍경인데 그때그때 멈출 수 있어서 좋다.
산 바람을 느끼고 싶으면 좀 더 달리고, 그러다 바다가 가까이서 보고 싶어 지면 잠깐 발걸음을 멈춘다. 몸과 마음이 가볍다. 내 호흡이 이 섬의 공기에 맞춰 흐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상쾌하다.
쇼도시마섬은 올리브 오일만큼 간장이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섬 곳곳에 양조장이 있어서 안을 구경해볼 수도 있고, 덤으로 간장 아이스크림도 맛볼 수 있다. 왜 양조장이 많을까 알아보니 원래는 양질의 소금이 나는 곳으로 유명한데 오히려 소금 산업이 포화되면서 돌파구를 찾던 마을 사람들이 간장으로 눈을 돌린 게 그 시작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일본에 존재하지 않았던 올리브를 심기 시작하고, 좀 더 산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간장을 만들기 시작한 쇼도시마섬 사람들. 평온하고 한적한 섬 이면에 이곳 사람들의 열정적인 도전 정신이 깃들여 있다고 생각하니 이 섬이 100배는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또, 쇼도시마섬 하면 빠질 수 없는 우동. 일본에서 우동으로 가장 유명한 가가와현에 속한 섬답게 이곳에서도 맛있는 우동을 맛볼 수 있다. 가마아게 우동은 막 건져낸 면발을 찬물에 씻기지 않고 바로 먹는 우동이다. 면발을 찬물에 씻기면 온도차로 면발이 좀 더 탱탱하고 쫄깃해지는데, 막 건져내서 아직 열기가 남아있는 면발에 날계란을 버무려서 먹는 것도 별미이다.
산 바람으로 마음을 채우고 우동으로 배도 채웠으니 이제 힘을 쓸 차례이다. 쇼도시마섬을 여행지로 정한 이유 중 하나가 이곳의 바다에서 카누를 타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초 체력 제로인 나의 아웃도어 인생에는 몇 번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몇 년 전, 아직 겨울잠이 덜 깬 홋카이도 굿샤로 호수에서 카누를 타기 위해 장작 5시간을 달려갔으나, 물 공포증이 심한 나는 카누를 타다 긴장이 극치에 다다르면서 배 멀미? 카누 멀미?를 하는 바람에 노를 몇 번 휘젓지도 못하고 육지로 돌아와야 했던 아픈 기억이 있다. 결국 그 먼 곳까지 가서 남편을 혼자 타게 했던 미안함이 마음 한켠에 계속 남아있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꼭 같이 카누를 타겠다고 다짐했었다. 몇 번이나 브레인스토밍을 해보기도 하고 체력적으로도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려고 했다. 이번에는 잘 탈 수 있을까 걱정 반 기대 반이었는데 다행히도 바다 한가운데서 노를 젓고 있다. 물 공포증, 고소 공포증, 폐쇄 공포증 등 겁이란 겁은 다 장착한 나인데 남편이 있으니까, 남편 덕분에 세상이 좀 넓어진다. 함께 호흡을 맞춰서 저어야 제대로 나아가는 카누. 뒤에 앉은 남편이 방향을 지시해주면 나는 그 말을 믿고 열심히 노를 젓는다. 한 사람이 쉬고 한 사람만 저어도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다 물살이 약간 거세지거나 방향을 틀어야 할 때는 또 같이 젓는다. 한 배를 탄 우리가 때로는 호흡이 안 맞을 수도 있고, 노를 젓는 세기가 서로 다를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쉬어야 해서 다른 누군가가 그 몫까지 열심히 저어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물의 흐름에 맡겨 노를 젓지 않아도 흘러갈 때가 있다. 앞으로 긴 우리의 나날도 함께 호흡을 맞춰갈 수 있길 바라며 노를 저었다.
15~20분 남짓을 저어 조용한 후미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잠깐의 휴식.
갔던 길을 돌아 다시 육지로 돌아왔다. 쨍쨍한 햇볕 덕분에 젖었던 옷이 금세 말랐다.
산 바람 따라 바다 바람 따라 마음 가는 대로 하루를 보냈다. 자전거 할아버지 같은 삶의 관록이 나에게는 아직 많이 부족해서 여전히 지난 일에 대한 미련이나 닥쳐오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게 내 발목을 잡기도 한다. 그럼에도 서툰 내 옆에서 나와 함께 호흡을 맞춰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오늘,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었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