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독가는 아니다. 마음은 한 달에 한 권이라도 읽고 싶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못 지킬 때가 더 많다. 다만 책벌레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 늘 책이 많았고 그래서인지 책이 가득한 공간에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러고 보니 대학생 때는 학교 도서관 제일 위층의 비교적 사람이 적은 일문학 서가 구석 자리를 전세 냈었고, 지금도 일하다가 뭔가 잘 안 풀려서 답답할 때는 잠깐 사내 열람실에 틀어박히곤 한다. 책을 좋아한다기 보단 책에 둘러싸인 공간을 좋아한다는 게 더 정확한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 자신을 둘러볼 여유가 없어서 그랬는지 독서에 대한 허기는 별로 없었다. 그러다 점점 내가 가진 지식이나 경험만으로 나를 굴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내 바닥을 들켜버릴 것 같은 때가 돼서야 책을 읽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일본 생활도 길어지고, 일본어보다 한국어를 더 잘 구사해야 하는 환경에 놓이게 되면서 한국 책이 그리워졌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일본에서 한국 원서를 구하기는 너무 어려웠다. 한국에서는 어렵지 않게 일본 원서를 구할 수 있지만 반대로 일본에서 수요가 적어서 그런지 좀처럼 한국 책을 접할 길이 적었다. 그 와중에 알게 된 곳이 한국 서적을 취급하는 '책거리'라는 가게였다. 한국 서적의 출판과 판매는 물론, 서점 겸 카페를 운영하면서 정기적으로 한국 문학에 관한 북토크 등도 개최하는 가게다. 그때의 나에겐 단비 같은 존재였지만 도쿄에 있기 때문에 쉽게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아... 금요일 퇴근길에 잠깐 들려 책을 읽고 싶은 그런 곳인데... 하는 아쉬움을 2-3년 가까이 품고 있었다. 그때 알게 된 곳이 책거리가 위치한 일본 대표 고서적 거리인 '진보초'의 존재였다. 언젠가 꼭 가야지 하면서 기회를 보던 와중에 도쿄에 갈 일이 생겨서 염원하던 진보초로 향하게 되었다.
실제로 와보니 예상보다 훨씬 규모가 큰 곳이었다. 150곳도 넘는 책방이 모여있다 보니 어떤 책을 볼지, 어느 책방을 갈지 우선 정하지 않으면 길에서 눈만 굴리다 시간 다 갈 것 같았다. 고맙게도 진보초의 헌책방을 소개한 지도가 있어서 이 중에서 추려보기로 했다. 그래도 출장 찬스로 온 곳이니까 일할 때 쓸 수 있는 책들을 보고 싶었다.
진보초(神保町)는 세계 최대의 헌책방 거리라는 명성답게 일본의 주요 출판사를 비롯한 서점들이 밀집해 있다.
또한 도쿄의 주요 대학들이 몰려있는 대학가이기도 해서 그러한 환경적인 측면도 이곳이 오래도록 헌책방 거리로 남아있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지금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보다는 인터넷으로 좀 더 빠르고 편하게 정보를 얻는 시대지만, 옛날에는 새로운 지식을 접하고 쌓기 위해서 책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책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였고, 그곳에서 지식을 가진 사람과 그것을 얻고자 한 사람들 간의 교류가 이뤄지면서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일본 문화의 저변 어딘가에 이곳 진보초의 자취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빨리 곳곳을 탐방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마음이 급해서 책방 문 열기도 전에 거리로 나왔다. 아쉽게도 오전밖에 둘러볼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진보초의 메인 거리인 야스쿠니 거리를 위주로 돌아봤다.
저렴하면서 눈길을 끄는 책들을 가게 앞에 진열하는 것으로 진보초의 하루가 시작된다. 전문 고서부터 잡지, 아동서 등등 다양한 책들이 늘어서 있다. 희귀한 고서들은 그 가치만큼 가격이 뛰었지만 일반서는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일할 때 참고서로 쓰기 위해 미술 관련 책을 찾다가 우연히 발길이 닿은 가게가 있었다. 미술서, 사진집, 디자인 서적 등등 주로 예술 관련 책을 취급하는 GENKIDO(源喜堂)라는 가게이다. 가판대의 책들은 무심하게 놓여있다. 가장 저렴한 책은 100엔에 살 수도 있다. 반면 책방 안의 책들은 분야별로 한 권 한 권 아주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단골손님으로 보이는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책방 직원의 모습에서 어딘가 자신의 책방에 대한 자부심이 풍겨졌다.
진보초 서점 중에서도 특히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가게가 있다. 1918년에 문을 열어 백 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야구치 서점(矢口書店)이다. 영화나 연극, 희곡, 시나리오 등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가게이다. 서점 안도 구경해보고 싶었지만 출장 짐 때문에 커다란 배낭을 멘대다가 앞에서 들렸던 몇 군데 서점에서 책을 사는 바람에 양손에 짐이 가득했다. 좁은 서점을 둘러볼 때는 마음만큼 몸도 가볍게 움직여야 한다는 걸 깨닫고는 밖에서만 구경했다.
메인 거리 이외에도 골목 곳곳에는 책들이 넘쳐났다. 몇 권 더 사고 싶었지만 다 들고 돌아갈 수 없어서 몇 번이나 마음을 접었다. 책에 둘러싸이면 나도 모르게 책방 마법에 걸려서 이 책도, 저 책도 다 재밌어 보이는데, 막상 내 책장에 꽂아보면 좀처럼 손이 뻗어지지 않는 책들이 있다. 책방에선 빛나 보이던 책도 내 책장에 들어서면 언젠가 읽히기를 기다리는 대기조에 합류해버린다. 세계 제일의 책의 거리라는 진보초 한복판에 있으니 책들을 발견할 때마다 자꾸 책방 마법에 걸릴 것 같았다. 아슬아슬한 고비를 몇 번 넘기고는 관심 있던 책의 이름만 메모를 하고 다시 책장에 돌려놨다. 언제 읽히질도 모른 채 내 책장의 장식품 마냥 꽂아두기가 미안해서 되도록 맘 내키는 대로 책을 사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꼭 필요하다는 확신이 든 몇 권만 추려서 샀다.
대부분 일할 때 쓸만한 책을 샀는데, 그중 가장 사길 잘한 책은 <삿포로 역사 사진집>이라는 두 권짜리 책이다. 지금은 일본 5대 도시 중 하나가 된 삿포로가 개척의 역사를 거쳐 지금의 도시로 발전되기까지의 모습을 사진으로 알기 쉽게 소개한 책이다. 늘 지나치던 삿포로의 거리들도 좀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볼 수 있길 바라며 이 두 권의 책을 내 책장에 꽂았다.
책이란, 독서란 뭘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는 책이 아니라도 충분히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럼에도 책은 인간의 고독함과 외로움을 채워주는 둘도 없는 친구인 것 같다. 내면의 허기는 결국 나 스스로가 바라보고 보듬어줘야 하는데, 책과 마주하는 시간만큼은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퇴근 후 매일같이 책을 읽으셨던 것도, 선생님이 독서를 평생의 취미로 삼으라고 하셨던 것도, 나보다 인생을 한 발짝 먼저 가고 있는 선배들의 경험에서 나온 말과 행동이구나, 납득이 간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