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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전으로 타임슬립, 도쿄 학사회관 호텔

by 어떤 하루

출장 내공이 쌓인 사람들을 보면 업무에 차질이 없는 선에서 본인 사심 야무지게 채우고 돌아오는 출장러들이 있지만, 나에게 그런 영리함은 없다. 시간을 잘 쪼개서 움직일 부지런함도 체력도 없다. 출장 갔음 업무만 딱보고, 식사도 그냥 활동 반경 안에서 대충. 숙소도 업무 보는 곳 가까운 곳으로 대충. 여행이 아니니까 그렇게 하는 게 맞기도 하지만, 가끔은 내가 인생을 너무 정직하게만 사나,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회생활 7년 차에 접어들다 보니 가끔은 꾀를 부리고 싶은 순간도 있다. 소심함에서 벗어나 맛보는 소소한 짜릿함 같은 걸 꿈꾼다고 할까. 그래서 출장으로 도쿄에 간 김에 소소하게나마 사심을 채워보는 내 나름의 도전을 해보았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서 그런지 사실 도쿄라는 도시에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주변 친구들이 도쿄로 유학을 갈 때도 나는 도쿄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 당시에는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건 왠지 거부감이 들었던 이상한 치기가 있었다. 또 소도시나 자연 같은 로컬 여행을 좋아하다 보니 도쿄는 '잘 다듬어진 도시'라는 인상이 강해서 특별하게 와 닿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도쿄를 몰라도 한참 몰랐던 것 같다. 나이가 좀 들어서 남의 말도 듣게 되고 시야도 조금 넓혀보니 도쿄는 참 재밌는 장소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어느 도시나 화려함 이면에는 오래되고 낡았지만 역사가 고스란히 쌓여있는 공간들이 많이 있는데, 오래된 걸 잘 보존하고 유지하려는 일본의 국민성이 더해져서인지 도쿄의 곳곳에는 오래되었음에도 옛 분위기가 잘 남아있는 곳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도쿄의 헌책방 거리 진보초에 있는 '학사회관(學士會關)'이다. 언젠가 헌책방 거리를 구경해보고 싶어서 진보초를 마음 한켠에 품고 있던 참에 당일치기로 도쿄 출장이 잡혀서(심지어 금요일로!) 망설임 없이 하루 더 머물기로 정했다. 도쿄에 자주 가는 지인에게 진보초에 가고 싶다고 했더니 자기가 항상 묵는 호텔이 있다며 추천해줬는데 그곳이 바로 학사회관이었다. 1928년에 지어졌으니 90년이 더 된 건물이다. '학사회관'이라는 이름처럼 이곳은 대학교와 관련이 있는 건물이다. 도쿄대학의 전신인 제국대학의 졸업생들이 동창회를 목적으로 마련했던 모임이 확대되면서 일본 7대 국립대학의 모임이 만들어졌고 모임의 거점으로 이 회관이 지어졌다고 한다. 아마 당시에는 사무실이나 관련 행사를 주최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던 것 같다. 현재도 과거의 기능을 유지하면서 숙박, 식당, 예식장 등의 기능이 더해졌다.

외관은 과거의 고풍스러운 서양 건축을 남기면서도 노년층이 많은 방문객들을 배려하여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다. 이날도 무슨 행사가 있었는지 회장님을 연상시키는 검은 차들이 주차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외관만큼이나 내부도 고전적인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엘리베이터가 있지만 빨간 카펫이 인상적이라서 계단을 이용했다.


방으로 가는 복도 곳곳에도 고풍스러운 공기로 가득하다. 학사회관이라는 건물의 성격을 투숙객에게 상기시켜주려는 듯한 노력이 느껴진다. 오래된 건물이 지닌 역사를 낯선 투숙객에게 공유해주면서도 외부인으로 인해 분위기가 깨지지 않길 바라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내가 묵은 424호실. 당시에는 세면대나 욕실이 없었던 것 같은데 호텔로 정비되면서 방마다 세면 공간과 욕조가 마련된 것 같다. 보통 비즈니스호텔에 가면 창문이 턱없이 작거나 커튼을 열어도 옆 건물의 벽이 보일 뿐이라서 비상시 탈출구 이외의 기능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 방은 넓진 않지만 천장이 높고 창문이 큼직해서 도쿄 호텔 특유의 답답함이 없었다.


무엇보다 책상이나 의자부터 작은 소품 하나까지 오래된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으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평소에도 오래된 목제 가구를 좋아해서 그런지 세월과 함께 진해진 색감과 부드러워진 결, 뭉뚝해진 모서리가 마음 한켠을 따뜻하게 해준다.


잠시 과거로 돌아갔던 마음을 제 시간으로 돌려주는 창문 밖 풍경.


이 건물이 가진 역사나 상징성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이곳에 묵었던 이유 중 하나는 조식이다. 이곳을 추천해준 지인이 양식 메뉴의 계란 요리를 오믈렛, 스크램블 에그, 계란 프라이 중 고를 수 있다면서, 꼭 오믈렛을 먹어보라고 해줬기 때문이다.

레스토랑의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토요일 아침의 사치스런 시간. 특별할 거 없는 조식일 수도 있지만, 토요일 아침에 누군가가 만들어준 근사한 식사를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졌다. 비싸고 특별한 식사가 아니라 그냥 한 끼라도 그 시간에 집중할 수 있는 식사를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침에는 출근 준비에 쫓겨, 점심에는 밀린 업무들에 치여, 저녁에는 안 먹으면 안 될 것 같은 의무감에 눌려 내 앞에 차려진 음식들을 그냥 뱃속에 넣기 바빴다. 그간 친절하지 못했던 음식들에게 미안해지는 순간이다.


누군가가 부단히 이어온 시간의 한켠에 잠깐 들어갔다 온 듯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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