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메지마를 뒤로하고 오키나와 본토로 돌아간다. 공항이 작아서 그런지 직원들이 손수 배웅해준다.
나하에 도착하고 나서는 오키나와 중부로 이동했다. 나하와는 또 다른 오키나와의 시골 풍경이 보고 싶어서 '나키진(今帰仁)'이라는 곳으로 왔다. 이곳에도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구스크성 터가 있다.
오키나와에는 '구스크'라고 하는 성벽이 많이 남아있다. 이 '구스크'라는 용어는 원래 오키나와의 역사 중 하나인 구스크 시대에서 따온 말이다.
지금이야 오키나와가 일본의 대표적인 남쪽 휴양지로 인식되지만, 사실 오키나와는 원래부터 일본이 아니었다. 구스크 시대를 거쳐 류큐왕국을 세운 독립 국가였던 오키나와는 1600년대 초부터 규슈 남부의 사쓰마번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이후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일본에 정식으로 편입되었다. 오키나와라는 명칭도 그때 붙여진 이름이다. 1945년 패전 이후 27년 동안 미국의 통치를 받았고, 1972년에야 본토 복귀를 선언하며 지금의 오키나와에 이르게 된다.
전쟁 때는 총알받이의 땅이 되었고, 패전 후에는 미국의 통치하에 있었으며, 지금까지도 미군의 주둔지인 오키나와. 수많은 역사 속에서 많은 아픔과 한이 서려있을 이 땅. 그래서인지 온전한 독립 국가였던 당시에 세웠을 구스크 성벽에 올라보면 어딘가 짠한 마음이 든다.
2000년에 류큐왕국 구스크 및 관련 유산군으로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일본 본토에서 보던 성벽들과 한눈에도 다르다는 것을 통해 오키나와가 일본과는 다른 고유의 문화를 만들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구스크의 축성 목적과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성벽이니만큼 당연히 군사 시설이 아닐까 싶었는데, 단순한 군사 시설이기보다는 성역, 또는 촌락이나 지역 유력자의 거성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중 이 나키진 구스크는 1400년대 초반 이후에는 수장의 거처지로 사용되다가 1600년대 이후 일본 본토의 사쓰마군의 공격으로 성이 불타버리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정신적인 상징으로서 사람들이 찾았다고 한다.
성벽을 따라 천천히 걸어본다. 한때는 성역이었을지도 모르고, 한때는 누군가의 거처였으며,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머무는 장소.
뉘엿뉘엿 저무는 햇살 따라 산책을 하다 보니 기분 좋게 낮잠 자는 고양이 한 마리가 보인다.
나키진은 오키나와의 중심인 나하에서 차로 1시간 반 정도 떨어진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지금은 대표적인 휴양지로 각광받는 오키나와지만, 지금의 오키나와가 있기까지 어떤 역사들이 차곡차곡 쌓여 왔는지, 발걸음을 옮겨서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바다에 인접한 숙소에 짐을 풀었다. 저녁 식사가 따로 마련되지 않은 숙소였지만, 주변 식당을 소개해주었다. 저녁 먹으러 가기 전에 잠깐 피로를 녹였던 숙소 앞바다. 규모는 작지만 그 풍경은 다른 바다들 못지않다. 오키나와 곳곳에는 가이드북에 실리지 않은 해변들이 산재해있다. 마을 주민들이 전세 내고 하루 종일 즐길 수 있는 해변. 도시에서는 누릴 수 없는 자연의 풍족함이 부러울 따름이다.
오키나와에서의 마지막 밤은 민요 주점에서 마무리했다. 오키나와 민요를 안주 삼아 지역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맛있는 술과 음식, 그리고 음악이 다 있는데 뭐가 더 필요할까. 이 가게에서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우연히 옆자리에 동네 아저씨가 앉았는데 딱 봐도 외지인인 우리가 신기했는지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왔다. 어릴 때부터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랐다고 하면서 이 가게는 소꿉친구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곳이란다. 거의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다나. 그러면서 우리에게 본인의 술까지 따라주면서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거기까진 참 재밌고 좋았는데, 취기가 오르고 기분이 좋아졌는지 좀처럼 우리를 놓아주질 않았다. 옆에 앉은 부인은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난리인데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신나서 끊임없이 이야기보따리를 푸시는 거다. 덕분에 즐겁긴 했는데 아저씨 어깨너머로 짜증 레이저 발사하는 부인의 눈빛을 우리가 받아내야 하는 그런 웃픈 상황. 여행 마지막 밤이니 우리끼리 소소하게 회포나 풀고 싶었는데 본의 아니게 아저씨의 어퍼컷으로 강렬하게 마무리. 뭐 여행이란 게 매번 계획이 틀어지니까 추억이 생기는 거 아니겠냐만은.
여행의 마지막 날. 숙소를 나와 저 길을 따라가면 바로 눈앞에 바다가 펼쳐지는 그런 사치스러운 아침.
우리가 머문 숙소는 오키나와로 이주한 부부가 손수 지은 곳이다. 마침 주인 부부가 남편과 같은 홋카이도 출신이라서 왠지 모를 친근감이 느껴졌다. 일본 최북단인 홋카이도에서 정반대인 오키나와로 이주했다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멋진 사람들이다. 내부 인테리어부터 가구들도 직접 나무를 잘라 만들었다고 한다. 독채로 된 방들이 여러 채 붙어있는 숙소인데 우리는 방이 없었던 관계로 어쩔 수 없이 4인실에서 묵었다. 목재로 된 인테리어는 어딘지 모르게 낯선 땅에서도 포근함을 느끼게 해 준다. 각 방마다 발코니가 딸려 있어서 수영복 등을 널거나 바람 쐬기 참 좋았다. 해먹에서 낮잠 자고 싶다.
아침 식사는 주인아저씨가 손수 구워준 빵과 따뜻한 야채수프. 정성 가득한 아침도 얻어먹고 이제 짐을 꾸려 떠나려는 찰나, 주인아저씨가 꼭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다고 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진짜 예쁜 바다가 있다고.
숙소에서 차로 10분 정도 달리니 작은 숲길이 나왔다. 이런 곳에 정말 바다가 있을까 기대반 의심반으로 아저씨를 뒤따라 걸었다. 어둑한 숲길을 빠져나오는 순간 눈 앞에 에머랄드빛 바다가 펼쳐졌다. 진짜 몇 번을 봐도 질릴 줄 모르는 너란 바다. 여행 마지막까지 감동을 주는 너란 바다. 주인아저씨의 친절함까지 더해져 바다가 참으로 반짝반짝 빛났던, 그런 여행의 에필로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