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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 하루 Jun 16. 2020

남편의 반대

장거리 생활을 택한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남편의 반대

"나 한 2년 정도 후쿠오카 가서 일하면 안 되겠지...?"


결혼 3년 차. 퇴근하는 남편을 마중 갔다 돌아오던 차 안에서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남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남편의 성격상 강한 부정을 하진 않았지만 내 물음에 금세 차 안의 공기가 무거워진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스스로 "그치, 안되지..."라며 자문자답으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 미련이 남았다. 보통은 비현실적인 일이라며 포기하고 말았을 텐데 이건 왠지 남편을 설득해서라도 내 뜻을 관철시키고 싶었다.


어느 남편이 아내가 갑자기 불쑥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당분간 떨어져 지내면 안 되겠지…?”라는 말에 바로 수긍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내 남편만은 다른 사람들보다 깨어있을 줄 알았는데 지극히 일반적인 반응이 돌아와서 혼란스러웠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매일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남편은 지금까지 내가 하는 일에 단 한 번도 반대하거나 부정한 적이 없었다. 어떤 결정을 하든 언제나 응원해줬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본인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처음에는 감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다 점점 몇 년 뒤에 돌아왔을 때 안정적인 일을 다시 구할 수 있는 건지, 그만큼의 시간을 투자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인지 등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말들도 쏘아붙였다. 남편의 말은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다 맞는 말들이었다. 반대와 설득을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가장 속상하면서 미안했던 건 남편이 이런 상황을 본인의 탓으로 돌렸던 것이다. 내가 타지까지 가서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본인과의 결혼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냐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분명 그런 게 아닌데. 내 스스로에게도 반문해봤다. 내가 가정보다 일을 우선시하는 건 남편과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해서 인가. 그렇다면 반대로 결혼 생활이 만족스럽다면 다른 것들을 다 포기할 수 있다는 건가. 내 감정을 단순히 이분법으로 정의하기 힘들었다. 분명 내게는 남편과의 생활에서 느끼는 만족감과 일하면서 느끼는 만족감은 별개인데… 정말 내가 이상한 건가, 혼란스러웠다.


그렇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서른 문턱. 아직 젊다면 젊은 나이. 나답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음으로써 우리가 좀 더 희망적인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면 지금의 몇 년 정도 투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건강하다는 전제 하에 앞으로 수 십 년을 함께 한다면 지금 떨어져 지내게 될 몇 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지 않을까,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기합리화를 하면서까지 마음 속엔 꺾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장거리가 힘든 이유, 그리고 그 힘듦을 극복하기 위한 계획

우리는 이미 장거리 연애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 힘듦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런데 한번 경험해봤기 때문일까, 절대 못 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머릿속 어딘가에 있었다. 장거리 연애 때는 나보다 오히려 남편이 더 의연했다. 우리는 ‘따로 또 같이’의 관계가 성격에 맞아서 그런지 사실 떨어져 지내야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덜 했다. 다만 남편은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결과’보다 왜 그런 결정에 다다랐는지 그 ‘원인’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나에겐 그 ‘원인’을 충분히, 그리고 성의껏 설명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나한테 ‘일’이 갖는 의미, 내가 지향하는 부부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때로는 뒤섞인 감정을 토해내다 보니 말이 눈물로 범벅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남편을 설득하는 일을 대충 할 수 없었다. 한편으론 원인 찾기에만 매달리다 보니 감정적인 소모만 반복되었다. 남편의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해소시킬 수 있도록 우리가 떨어져 지내면 어떤 생활을 하게 될지, 떨어져 지내지만 어떻게 소통할지 등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을 제시했다.


장거리가 힘든 이유는 한마디로 시간을 함께 공유하지 해서다. 각자의 세계에서 자기만의 시간으로 살아야 하니까 불안해지고 오해가 생기기 쉽다. 그리고  불안함과 오해보다  경계해야 하는  익숙함이다. 떨어져 지내는  익숙해지면 힘듦을 넘어 의구심이 생긴다. '떨어져 지내면서까지  굳이  관계를 지속해야 하지?'  시간의 익숙함이 지루함 내지는 무의미함으로 바뀌는 순간 장거리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떨어져 있다고 함께 시간을 공유하는 것을 소홀히 한다면,  장거리 생활이 언제 끝날지 기간을 명확하게 정해두지 않는다면, 장거리를 지속하기 어렵다는  너무나도  알고 있었다. 반대로   가지가 어느 정도 해결된다는 전제 하에 서로를 향한 믿음이 동반된다면 절대 실현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를 향한 믿음이 없다면 애초부터 떨어져 지내겠다는 생각조차  했을 터이니 그런 류의 걱정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함께 시간을 어떻게 공유할거냐와 장거리 생활을 언제 끝내냐였다.

내가 택한 직장은 비교적 연차를 자유롭게 쓸 수 있고 남편과 쉬는 날이 같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휴가를 내서 오갈 수 있다는 게 보장되었다. 근무 시간도 비슷하다 보니 연락을 주고받기에도 편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기간이 정해진 직책이기 때문에 장거리 생활에 기한이 있었다. 물론 모든 게 계획처럼 잘 될지는 미지수지만 어차피 인생이란 게 매번 불확실함 속에서 최소한의 확신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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