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거리 생활을 택한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남편의 반대
"나 한 2년 정도 후쿠오카 가서 일하면 안 되겠지...?"
결혼 3년 차. 퇴근하는 남편을 마중 갔다 돌아오던 차 안에서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남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남편의 성격상 강한 부정을 하진 않았지만 내 물음에 금세 차 안의 공기가 무거워진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스스로 "그치, 안되지..."라며 자문자답으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 미련이 남았다. 보통은 비현실적인 일이라며 포기하고 말았을 텐데 이건 왠지 남편을 설득해서라도 내 뜻을 관철시키고 싶었다.
어느 남편이 아내가 갑자기 불쑥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당분간 떨어져 지내면 안 되겠지…?”라는 말에 바로 수긍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내 남편만은 다른 사람들보다 깨어있을 줄 알았는데 지극히 일반적인 반응이 돌아와서 혼란스러웠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매일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남편은 지금까지 내가 하는 일에 단 한 번도 반대하거나 부정한 적이 없었다. 어떤 결정을 하든 언제나 응원해줬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본인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처음에는 감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다 점점 몇 년 뒤에 돌아왔을 때 안정적인 일을 다시 구할 수 있는 건지, 그만큼의 시간을 투자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인지 등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말들도 쏘아붙였다. 남편의 말은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다 맞는 말들이었다. 반대와 설득을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가장 속상하면서 미안했던 건 남편이 이런 상황을 본인의 탓으로 돌렸던 것이다. 내가 타지까지 가서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본인과의 결혼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냐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분명 그런 게 아닌데. 내 스스로에게도 반문해봤다. 내가 가정보다 일을 우선시하는 건 남편과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해서 인가. 그렇다면 반대로 결혼 생활이 만족스럽다면 다른 것들을 다 포기할 수 있다는 건가. 내 감정을 단순히 이분법으로 정의하기 힘들었다. 분명 내게는 남편과의 생활에서 느끼는 만족감과 일하면서 느끼는 만족감은 별개인데… 정말 내가 이상한 건가, 혼란스러웠다.
그렇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서른 문턱. 아직 젊다면 젊은 나이. 나답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음으로써 우리가 좀 더 희망적인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면 지금의 몇 년 정도 투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건강하다는 전제 하에 앞으로 수 십 년을 함께 한다면 지금 떨어져 지내게 될 몇 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지 않을까,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기합리화를 하면서까지 마음 속엔 꺾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장거리가 힘든 이유, 그리고 그 힘듦을 극복하기 위한 계획
우리는 이미 장거리 연애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 힘듦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런데 한번 경험해봤기 때문일까, 절대 못 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머릿속 어딘가에 있었다. 장거리 연애 때는 나보다 오히려 남편이 더 의연했다. 우리는 ‘따로 또 같이’의 관계가 성격에 맞아서 그런지 사실 떨어져 지내야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덜 했다. 다만 남편은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결과’보다 왜 그런 결정에 다다랐는지 그 ‘원인’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나에겐 그 ‘원인’을 충분히, 그리고 성의껏 설명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나한테 ‘일’이 갖는 의미, 내가 지향하는 부부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때로는 뒤섞인 감정을 토해내다 보니 말이 눈물로 범벅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남편을 설득하는 일을 대충 할 수 없었다. 한편으론 원인 찾기에만 매달리다 보니 감정적인 소모만 반복되었다. 남편의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해소시킬 수 있도록 우리가 떨어져 지내면 어떤 생활을 하게 될지, 떨어져 지내지만 어떻게 소통할지 등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을 제시했다.
장거리가 힘든 이유는 한마디로 시간을 함께 공유하지 못해서다. 각자의 세계에서 자기만의 시간으로 살아야 하니까 불안해지고 오해가 생기기 쉽다. 그리고 이 불안함과 오해보다 더 경계해야 하는 게 익숙함이다. 떨어져 지내는 게 익숙해지면 힘듦을 넘어 의구심이 생긴다. '떨어져 지내면서까지 왜 굳이 이 관계를 지속해야 하지?' 그 시간의 익숙함이 지루함 내지는 무의미함으로 바뀌는 순간 장거리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떨어져 있다고 함께 시간을 공유하는 것을 소홀히 한다면, 이 장거리 생활이 언제 끝날지 기간을 명확하게 정해두지 않는다면, 장거리를 지속하기 어렵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반대로 이 두 가지가 어느 정도 해결된다는 전제 하에 서로를 향한 믿음이 동반된다면 절대 실현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를 향한 믿음이 없다면 애초부터 떨어져 지내겠다는 생각조차 안 했을 터이니 그런 류의 걱정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함께 시간을 어떻게 공유할거냐와 장거리 생활을 언제 끝내냐였다.
내가 택한 직장은 비교적 연차를 자유롭게 쓸 수 있고 남편과 쉬는 날이 같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휴가를 내서 오갈 수 있다는 게 보장되었다. 근무 시간도 비슷하다 보니 연락을 주고받기에도 편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기간이 정해진 직책이기 때문에 장거리 생활에 기한이 있었다. 물론 모든 게 계획처럼 잘 될지는 미지수지만 어차피 인생이란 게 매번 불확실함 속에서 최소한의 확신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