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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 하루 Jan 07. 2021

삿포로에서 겨울나기

한국에도 오랜만에 함박눈이 내렸다고 들었다. 어린 조카는 어찌나 기뻤는지 밖으로 뛰쳐나가 눈을 맞고, 또 만지고, 뒹굴고, 한참을 좋아했다고 한다. 눈이 반가운 건 아이만이 아니었다. 인스타 피드가 눈 인증샷으로 가득한 걸 보면 어른들에게도 이번 함박눈은 반가운 손님이었던 것 같다.(물론 더딘 제설 작업 등으로 불편도 커 보였다. 빙판길도 걱정이다.) 눈을 보며 기뻐하는 친구들을 보며 어릴 때 눈만 오면 밖으로 뛰쳐나갔던 기억, 세상 진지하게 눈싸움하던 추억을 꺼내보았다. 내게도 눈이 마냥 좋던 시절이 있었구나 싶다.


연간 적설량이 6미터나 되는 삿포로에 산다. 11월부터 3월까지 일 년 중 다섯 달을 눈과 함께 지낸다. 이 정도의 대설 지역에 180만 명의 인구가 삶을 영위하는 도시는 전 세계적으로 삿포로가 유일하단다. 이 신기하고 독특한 눈의 도시를 직접 보고자 남들은 일부러 겨울에 찾아온다지만, 솔직히 나는 겨울만 되면 이곳을 벗어나고 싶던 적이 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인 겨울 왕국이 남들에겐 아름답게 보이겠지만, 이 눈이 현실이 되었을 때, 일상의 일부도 아닌 전부가 되었을 때, (미안하지만) 지겹고 불편한 존재가 된다. 삿포로 겨울에 대한 환상을 깨뜨릴 마음은 전혀 없지만 설국의 일상은 생각만큼 녹록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렇게 몇 년간 삿포로의 겨울을 부정해오다 얼마 전에야 환경이 변할리 없으니 그냥 하루빨리 내가 초연해지는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기본은 기나긴 겨울을 무사히 보내기. 겨울이라는 상대를 잘 알고 대처한다면 이 가혹한 환경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선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로 눈이 내리면 이동 수단에 제약이 생긴다. 평소 10분이면 걸어가던 길도 눈발이 휘날리고 꽁꽁 얼어버리면 몇 배로 시간이 든다. 일본의 비싼 교통비를 구제해주던 자전거는 얼토당토 없다. 버스나 전철은 운행 시간이 변경되거나 심할 땐 운행이 중단되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렵다. 그렇게 되면 가장 믿을 구석은 바로 자가용이다. 겨울철에도 안전하게 운전하기 위해선 타이어를 반드시 바꿔줘야 한다. 일반 타이어로 도로를 달리는 건 목숨을 내놓는 행위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년 10월 말에서 11월 초에는 겨울 타이어로 교체하기 바쁘다. 타이어를 바꾸고 나면 그제야 겨울의 시작을 실감한다. 그 밖에도 자동차용 제설 도구를 새로 장만하고 혹시 모를 폭설로 자동차가 눈에 파묻힐 때를 대비해서 삽도 챙겨둔다.


집안도 분주해진다. 일본의 다른 지역과 달리 홋카이도는 실내가 이중창이라 비교적 따뜻한 편이지만 그래도 새어 들어오는 한기를 막진 못 한다. 뽁뽁이와 바람막이 테이프로 베란다와 창문 곳곳을 봉쇄한다. 빙판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신발의 바닥 상태도 확인하고 방수용 스프레이도 뿌려둔다. 폭설로 밖에 못 나갈 때를 대비해서 식량과 생필품도 구비해둔다.


몸과 마음도 겨울 준비가 필요하다. 원래도 수족냉증이 있었지만 바닥 난방이 없는 냉골 같은 일본 집에서 오래 살다 보니 몸이 더 차졌다. 기초 체온도 올리고, 또 빙판길에 미끄러져 다치지 않기 위해선 체력을 키워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가급적 매일 스트레칭을 해주고 일주일에 몇 번이라도 반신욕을 하려고 한다.


체력 관리만큼이나 중요한 게 마음 준비다. 매서운 강추위보다, 끝없이 퍼붓는 눈보다, 사실 가장 힘든 건 적은 일조량이다. 삿포로의 겨울철 하루 일조 시간은 3시간이 채 안 된다. 대설 지역에서 실제 살아보지 않으면 아마 쉽게 상상이 안 되겠지만, ‘겨울 우울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기분이 많이 다운된다. 눈이 많이 오면 자연히 외부 활동이 줄어들고, 쾌청하고 맑은 날보다 흐린 날이 많아서 일조량도 감소한다. 빛을 못 보면 우울해지기 십상인데, 그래서인지 홋카이도는 일본 전국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다. 또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겨울이 되면 해가 더 짧아진다. 오후 3시 반이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다가 4시가 지나면 어두워진다. 계절과 날씨의 영향을 잘 받는 편이라 어둡고 흐릿한 이곳의 겨울이 버겁기도 하다. 그래도 이 우울한 겨울 기운에 휩쓸리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 중이다.


겨울 내내 내리는 눈에 더 이상 특별한 감흥을 느끼진 못 한다. 그치만, 곧 눈이 올 것을 알려주는 눈 벌레의 존재, 청명한 겨울 공기를 들이마실 때의 상쾌함, 밤새 소복하게 쌓여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처음 밟을 때의 쾌감, 걸을 때마다 뽀득뽀득 나는 경쾌한 눈 소리, 새하얀 눈에 반사된 눈부신 햇빛, 늦은 밤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제설차 소리 등등 겨울이 가져다주는 소소한 순간을 부디 일상에 매몰되어 놓치진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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