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업은 학생, 부업은 전업주부입니다.
김민주 작가의 [로마에 살면 어떨 것 같아?]를 오늘 아침 완독했다. 작가의 어머님은 이탈리아에 가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한다. 어머님은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엄마가 가고싶다던 그 이탈리아를 작가는 홀로 가서 그곳에서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계속 살아가고 있다. 한 5년만 살다 돌아와야지 하고 작정하고 갔다가 인생은 그렇게 흘러갔다고 한다. 작가의 책을 읽기 전에 유투브에서 이탈리아 로마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영상을 먼저 접했다. 이탈리아 로마 서점_ 정확히는 이렇게 검색어에 집어넣었다. 이탈리아어는 이제 막 진입한 순간에 언제나처럼 나는 또 이탈리아 가서 이탈리아어로 된 책을 마구 읽어줘야 하니까 어디 한번 이탈리아 로마 서점은 어떤가 영상으로 먼저 접해보자꾸나 시건방을 떨었다. 그렇게 해서 접했다. 사람이 한곳에 집중하고 한곳에 애정을 지니면 그 깔때기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요즘은 이탈리아라는 깔때기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중이다.
이탈리아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겪는 생활사 이야기. 이탈리아라는 나라가 좋은 건 또 좋은데 안 좋은 건 또 그렇게나 안 좋을 수가 없다. 더구나 지금 폭망하고 있다고 하니까. 요즘 무슨 외국어 공부하니? 친구들이 물었다. 이야기했다. 이탈리아어. 다들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아니 폭망하는 나라 언어를 배워서 무엇 하려고? 미래를 보고 베트남어나 아랍어, 하다못해 스페인어를 공부해야지 무슨 이탈리아어냐 다들 난리도 아닌. 로마에 있는 신부님이랑 상하이에서 이탈리아어 가르치고 있는 프랑코만 좋아한다. 다시 이탈리아어 시작해서 고맙노라고 인사까지 받는다. 그렇게 해서 읽게 된 [로마에 살면 어떨 것 같아?].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에세이를 읽다보면 그런 구절이 나온다. 어머니가 독일어를 공부하고 싶어, 하고 아들에게 이야기하는 장면. 아이엠에프가 터지고 전업주부였던 작가의 엄마는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나섰다. 모두 다 힘들고 힘들어 우울만이 그득한 상황에서 작가의 엄마가 작가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난 네가 나중에 지금을 돌아봤을 때, '그때 참 힘들었었지'라고 말하게 되면 좋겠다." (157)
작가는 엄마 말대로 시간이 흐르고 흘러 과거를 떠올리며 그때 참 힘들었었는데_ 라고 말한다. 모든 것들은 지나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엄마가 작가에게 그런 말을 했을 때, 그 모든 불운과 불행한 시간이 지나고났으니 이제 웃음만이 가득하리라 염원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순간 통증이 느껴졌다.
"매일이 지치고 막막한 시간이었지만 엄마는 항상 무언가를 공부했다. 쉬는 날이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었다. 천장 모서리에 곰팡이가 껴있던 내 방에서 [로마인 이야기]를 읽던 엄마가 나에게 말했다. 언젠가 이탈리아에 가보고 싶다고." (158)
본업은 학생, 부업은 전업주부. 얼마 전에 딸아이가 내게 붙여준 본업과 부업이다. 웃으면서 대꾸했다. 본업과 부업이 바뀌었어 아가. 딸아이 말실수를 정정해주려고 했다. 아이가 이야기했다. 아니야, 우리 선생님이 그러셨어. 항상 읽고 쓰기를 계속한다면 그 사람은 계속 학생이라고. 학교를 다니건 말건 무관하게 스스로 알아서 읽고 쓰는 일을 한다면 학생이라고. 끝없이 공부하려는 태도가 그 사람을 학생으로 만드는 거라고. 사람은 죽기 전까지 계속 공부하는 존재라고 선생님이 그러셨어. 그러니 엄마는 본업이 학생이고 전업주부는 부업이야. 그 말을 듣는데 오에 겐자부로 어머니가 독일어를 공부하고싶다고 말한 것과 작가의 어머님이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언젠가 이탈리아에 가보고 싶노라고 말씀하신 것이 떠올랐다. 그들은 끝없이 지금 여기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꿈꾸었다. 그 다른 곳에 두고 온 내 꿈과 내 젊은 시절과 내 미래를 동시에 떠올리며 그들은 독일어를 공부하고 싶어, 이탈리아에 가고싶어 라고 했다.
농담조로 친구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유럽인의 망딸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이걸 맨날 자기암시로 주문 외우듯 말해. 나는 유럽인이 아니다, 나는 유럽인이 아니다. 나는 한국사람이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한 아줌마이다. 라고. 그런데 이게 틀린 거 같다. 나는 유럽인의 망딸을 지니고 있는 거 같다. 변덕스럽고 온전하게 한 곳만을 향하지 않는 것도 유럽인의 망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듯. 보고싶은 것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고 배우고싶은 것도 많아서 아마도 유럽인이 맞지 싶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자신있게 외쳤다. 나는 이탈리아인 영혼을 지닌 한국 아줌마야. 그러니까 로마에 살아도 잘 살 거 같아. 우아한 척 하지 않고 말하고싶은 것도 다 말하고 쓰고싶은 것도 다 말할까보아. 말이 좀 많으면 어때. 주책을 좀 부리면 어때. 와인을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많이 마시면 어때. 가끔 흥에 겨우면 담배를 입에 물기도 하겠지. 조금 더 자유롭게 산다고 해서 어디 망가질 거 같지도 않아. 그러니 뭐 로마에 가서 살아도 좋을 거 같아. 아예 뼈를 묻겠다는 것도 아닌데 뭐. 이탈리아에 가서 이탈리아인 망딸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 한번 알아보고 싶다.
전업주부가 집 안에서 계속 천사 노릇을 하면서 만족하리라고 사람들은 혹시라도 착각할까. 먼지 한톨 없는 깨끗한 집 안을 보면서 뿌듯함을 느끼는 건 찰나이다. 먼지는 금세 끼고 빨래를 끝없이 돌려도 세탁기와 건조기는 멈출 줄 모른다. 뚝딱 하고 도깨비 방망이가 거한 칠첩 반상을 차려준다면 좋겠는데 나물 하나를 무칠려고 해도 그 모든 과정에는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다. 걸레질을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널면서 아이들이 먹을 간식을 만들면서 전업주부가 다른 꿈을 꾸지 않으리라고 여긴다면 거대한 착각이다. 집 안의 천사 노릇을 당장 집어치우고 독일로 이탈리아로 날아가서 공부만 실컷 하면 좋겠다는 욕망을 품고 있다는 걸 내보이면 철이 덜 들어도 아직 덜 들었다고 철이 들려면 한참 멀었다고 어딘가에서 혀 차는 소리가 집단으로 들릴지도. 그들의 혀 차는 소리를 못 들은 척 무시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내 꿈을 내 공부욕망을 나는 모르겠다 하고 모르쇠로 무시하는 일은 과연 쉬울까. 나는 오늘도 빨래를 돌리고 아침밥을 차리고 청소기를 다 돌린 후에 이탈리아어 문법서를 펼친다. 이탈리아에 가서 이탈리아어 책을 마음껏 읽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