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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인 Suin Park May 03. 2023

약동하는 음악의 생명력

악보, 작곡, 연주에 대한 단상



‘대한민국 실내악 작곡제전’(이하 대실작)에 함께해온 것이 어느새 4년째다. 2020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이 창작음악제에서 세미나와 비평을 맡아왔다. 이 축제가 2007년에 출범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너무 짧고도 소박한 시간이지만, 나름대로 지난 3년과 올해를 나란히 두고 생각해 보자니 이번 ‘대실작’은 내게 특별했다. 이번 음악회를 감상하면서 떠오른 키워드가 다름 아닌 ‘연주’였기 때문이다.


지난 3년 동안 이 음악축제를 비평하면서 내 관심은 연주보다는 주로 작품 자체에 있었다. 이런 점은 나뿐만 아니라 매년 다른 회차에 이 음악회의 세미나와 비평을 맡은 다른 음악학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대실작’은 다름 아닌 국내 작곡가의 창작 음악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무대다. 그럼에도 나는 이번 음악회 비평의 주제를 ‘연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계기는 단순하다. 연주가 훌륭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연주가 훌륭해서 좋았다’고만 쓰면 여러 오해가 생길 수 있으니 그 이야기를 조금 길게 해보려고 한다. 이야기는 악보에서 시작된다.


사진 출처: unsplash


문학이 글과 독자를, 회화가 그림과 감상자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과 달리 음악은, 특히 서양예술음악은 작곡(혹은 그 결과물인 악보)과 연주 두 단계를 거쳐 청자와 연결된다. 같은 맥락으로, 문학에서는 ‘글’이, 회화에서는 ‘그림’이 ‘작품’이라는 점이 비교적 분명한 것과 달리 음악은 악보가 작품인지, 연주가 작품인지 분명하지 않은 면모가 있다. ‘작품(作品)’이라는 말에서 ‘품’(品)이라는 글자가 ‘물건’을 일컫는다고 할 때,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악보를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음악이 ‘시간과 함께 펼쳐지는 소리 예술’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종이로 된 물건인 악보 그 자체로는 시간이나 소리와 연결되는 지점을 찾기 어려워서다. 그렇지만 서양예술음악의 역사는 꽤 오랫동안 악보를 작품으로 간주해왔다.


악보가 작품이라는 생각은 어쩔 수 없이 소리 자체와 멀어진다. 이런 일은 아직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관념적 소리, 작곡가의 머릿속, 혹은 마음속에 있을, ‘진짜 음악’이라고 여겨지는 무언가를 음악 기호로 치밀하게 번역한 기록이 바로 악보라는 점에서 더 강화된다. 그러나 물질화된 악보든 작곡가 내면의 관념적인 것이든, 그 어딘가에 ‘진짜 음악’이 있다는 생각은 필연적으로 실제 소리로 구현되는 연주를 부차적인 것으로 만든다. 악기를 배운 적이 있다면 언젠가 한 번쯤 들어봤을 “악보대로 연주하렴”이라는 말은 악보에 적힌 작곡가의 의도를 왜곡 없이 온전히 소리화하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 같은 일은 작곡가가 현존하는 현대음악의 경우 더 복잡해진다. ‘진짜 음악’의 주인의 암묵적인 그늘에서 연주의 자유는 제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예술음악에서 음악을 사물화하는 이 같은 문화는 이미 여러 학자들이 지적해온 바이며, 이 글에서 그 점을 되풀이하는 일이 무의미한 것은 아닌가 염려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악보란 음악이 발생되기 위한 기본 조건이 된다는 생각은 서양예술음악 현장에서 지금도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다. 바이올린을 연주할 줄 아는 나의 경우, 재즈 음악을 좋아하던 친구가 “내가 피아노를 칠 테니 C장조에서 아무 음이나 소리 내 봐. 같이 연주해 보자.”라고 제안했을 때 무척 당황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진 출처: unsplash


바로 이 같은 맥락에서 이번 ‘대실작’은 연주의 생명력을 일깨운 음악회였다. 이 음악회에서 음악은 빼곡한 음악 기호들로 문서화된 악보가 아니라 그것이 소리화되는 모든 과정들이었다. 예컨대 세 개의 독주 작품들, 작곡가 한대섭의 〈Wind Waves〉(바이올린), 작곡가 진희연의 〈위로〉(첼로), 작곡가 이재구의 〈놀이(의 이유)〉(비올라)에서 음악은 악보의 고정성과 연주의 자유로움 사이의 팽팽한 긴장 속에 피어났다. 그중에서도 작곡가 이재구의 〈놀이(의 이유)〉는 때로는 묵직하고 때로는 날카로운 비올라의 음향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 무대는 흡사 연주자가 비올라를 연주하는 것인지 비올라가 연주자를 연주하는 것인지 헷갈릴 만큼, 악보를 뚫고 나오는 생동감 있는 연주로 온 객석을 가득 채웠다.


작곡가 박현숙의 해금, 가야금, 타악기, 피아노 앙상블을 위한 〈시간의 기억-놀이 1〉과 플루트, 클라리넷,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앙상블이 연주하는 작곡가 남정훈의 〈Melos〉는 연주자들 간 호흡이 인상적인 경우였다. 〈시간의 기억-놀이 1〉은 서로 다른 문화권의 악기들이 함께 연주하면서도 음량과 음향이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었고, 현대음악 앙상블 Eins가 연주한 〈Melos〉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문현대음악 연주 그룹이 가진 빼어난 연주력과 연주자 간 호흡이 돋보였다. 또한 3악장으로 구성된 작은 음악극인, 작곡가 김지현의 판소리와 6중주를 위한 〈춘향의 말〉은 이미 악보 자체가 소리에 관한 모든 정보를 담으려는 것에서 자유로운 듯했다. 이것은 소리꾼 성부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소리꾼 성부에 선율이 지정되는 것은 마지막 악장인 3악장 “추천사”뿐이다. 다른 악장들에서 소리꾼 성부는 장단이 지정되는 것 외에 어느 정도 말의 빠르기로, 어떤 음고로, 어떤 음색으로, 어떤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것인지 악보에 명시되지 않는다. 실제 연주의 결과물은 소리꾼의 해석에 따라, 혹은 앙상블 연주자 및 작곡가와의 긴밀한 협의 과정에서 결정되었을 것이다.






이날 객석에서 감상한 연주는, 음악이란 연주되는 횟수만큼이나 무한한 생명력을 가지고 다시 태어난다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게다가, 모르긴 몰라도, 그 음악이 작곡가와 연주자의 매우 긴밀한 소통과 협업 과정에서 이루어진 결실이었을 것이란 점을 생각하면 이 날의 연주는 악보의 주인이라고 간주되는 작곡가가 적극적으로 음악을 만드는 데 함께하는 때조차 그 소리의 결과물은 매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이 음악회의 세미나를 진행하기 위해 작곡가에게 미리 받아본 연주 음원들 중 이날 연주의 표현 방식과 두드러지게 다른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악보는 음악가들의 협업에 필요한 단순한 소통 수단 정도로 이해될 뿐 아니라, 이제는 악보에 적힌 기호들을 소리로 구현하기 위해 무대 뒤에서 펼쳐지는 음악가들의 치열한 의견 조율 과정이 자연스레 빛을 낸다. 무대 뒤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음악가들의 이 같은 ‘음악하기’(musicking)는 무대 위 연주에서도 소멸하지 않는 빛을 간직한 채 청중에게까지 전달된다. 청중에게 전달된 그 빛은 또 다른 장소에서 새로운 생명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바로 이 글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음악전문잡지 ‘음악춘추’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http://kocoas.com/board/bbs/board.php?bo_table=notice&wr_id=215&l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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