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목요일에 있을 협의회 준비를 위해 오후에 잠깐 사전 점검을 하느라 지하에 새롭게 리모델링한 회의장에 내려갔다. 참석 인원수에 맞게 의자 개수를 확인하고, 모자란 의자는 어디서 보충할지 미리 점검했다. 옆 회의장 의자를 확인하느라 이리저리 오가던 중, 카페테리아 쪽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 협력사 소장님이었다. 아주 반가운 목소리로 “커피 한 잔 사드릴게요. 오세요”라고 했다. 나도 웃으며 “네, 감사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다시 회의장을 오가면서, 짧은 순간 여러 생각이 스쳤다. ‘내가 얻어먹어도 되나?’ ‘내가 사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모기업 직원이고, 소장님은 협력사 소속이다. 무의식 속에서 내가 ‘갑’이라는 위치에 서 있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월급도 더 받을 텐데, 얻어먹는 것이 괜히 미안했다. 그렇다고 그 분위기에서 거절하기도 애매했다.
이미 소장님 옆에는 우리 회사 직원 서너 명이 모여 있었다. 어떤 회의였는지 내용은 모르지만, 소장님은 회의에 참석했던 직원들에게 음료를 한 잔씩 건네고 있었다. 인사와 웃음이 오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때 내가 “저는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면, 그 좋은 흐름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았다. 호의를 베풀려는 사람에게 오히려 부담을 주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나는 커피를 즐기지 않는다. 필요할 때 마시긴 하지만, 내가 먼저 찾아서 마시는 음료는 아니다. 오늘도 딱히 커피가 당기지 않았다. 메뉴를 고르라며 적극적으로 권하는 소장님의 손길에 이끌려 내가 선택한 것은 청포도 주스였다. 아삭아삭한 살얼음이 가득한 연두빛 청포도 주스 한 잔.
억지로 얻어먹은 음료였지만, 달고 시원했다. 오후의 피로를 잠시 씻어주는 맛이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이 계속 찜찜했다. 이 주스를 받아 마신 게 과연 소장님을 배려한 걸까?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지 않기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음료를 주문한 것이 옳았을까?
결국 나는 몇 모금만 마시고, 남은 주스를 작은 종이컵에 나눠 담아 옆 동료들과 함께 마셨다. 음료를 즐기지 않기도 하고 혼자 마시기엔 양이 많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생각했다. 진짜 배려를 한다면, 소장님의 개인 돈이 쓰이지 않도록 처음부터 정중하게 사양하는 게 맞았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배려에는 정답이 없는 것 같았다. 모두 옳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는 마음도 배려이고, 상대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주는 것도 배려일 수 있다. 때로는 거절하는 용기가 배려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침묵 속에서 분위기를 지켜주는 선택이 배려가 되기도 한다. 진짜 배려란, ‘무엇을 했느냐’보다 ‘상대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았느냐’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청포도 주스 한 잔이 배려에 대해 생각하게 해 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