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는 해도 서운해

by 수인살롱


책임감이 강하고 속정이 깊은 친구가 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고마운 친구다. 나는 친구가 나를 다정하게 대해주기를 원한다. 하지만 친구는 업무가 많고 늘 바쁘고, 지쳐 있다. 그래서인지 그 친구는 나에게 자주 무뚝뚝하다. 말수가 짧고, 답장은 건조하고, 안부를 묻는 질문에는 대충 “괜찮아”로 끝난다.


오늘도 퇴근길 전화통화를 주고 받다가 사달이 났다. 내가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잠깐 꺼내니 회사일 얘기는 하지 마라며 내 말을 막아버렸다. 듣기 싫다는 소리다. 나는 그 일이 친구도 알면 도움이 될 일이라 생각해서 꺼낸 말인데 무안했다. 본인도 하루종일 업무에 시달리다가 즐거운 금요일 퇴근길에 내 회사일까지 이야기 하니 듣기 싫은가 보다 해서 나도 입을 닫았다.


이런일이 쌓이면 가끔씩 내 불만이 터져나온다. 내가 참다 참다 불만을 터트리면 아닌 밤에 왠 홍두깨냐 라는 식의 내가 뭘 또 잘못했는데 라며 친구는 어리둥절해 한다. 내가 왜 불만을 가지는지 모른다는 듯이 당황한 표정을 짓는 그 모습에 나는 더 화가 치밀어오른다. 하지만 버럭 화를 낼 수는 없고 다시 한번 더 참는다.


머리로는 이해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억지 친절을 베풀며 하루 종일 일에 시달렸을 텐데 나에게까지 친절을 요구하는 건 잔인하다는 걸 안다. 밖에서 감정 에너지를 다 써버려서 가깝고 편한 사람에게서는 에너지를 아끼고 싶어질 수도 있다. 왜 우리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아끼고 챙기고 배려하지 못하고 후순위로 미루게 될까? 밖에서는 친절한 미소를 장착하고, 가장 안전한 관계에서는 차가운 얼굴로 변해버리는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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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자기조절 고갈(Ego Depletion)’ 혹은 감정 자원의 소진이라고 설명한다. 로이 바우마이스터(Roy F. Baumeister)는 인간의 감정과 인내, 친절 같은 자기조절 능력이 무한하지 않다고 말했다. 하루 종일 감정을 관리하고, 예의를 유지하고, 상대의 요구에 맞춰 반응하다 보면 정작 가장 안전한 관계 앞에서는 그 에너지가 바닥난다는 것이다.


수전 데이비드의 『감정은 어떻게 삶의 힘이 되는가』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감정을 억누르며 생활하는 사람일수록 집에 돌아와서는 아무 말도 하기 싫어지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무심해질 수 있다고. 그러니 친구의 무뚝뚝함은 나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이미 하루치 감정을 모두 써버린 결과인 것이다.


그 마음을 안다고 해서 내 서운한 마음까지 없어지지는 않는다. 나는 그 친구에게서 최소한의 따뜻한 정을 나누고 싶었다. 대단한 위로도, 긴 대화도 아니고 “너도 힘들지?”라는 한 마디 정도면 충분한데 그마저도 욕심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자꾸 나 자신을 검열하게된다. ‘이 정도 섭섭함은 참아야지.’ ‘쟤는 원래 힘든 일이 많잖아.’ ‘괜히 서운해하면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 하지만 내 감정을 누르고 설득한다고 해도 서운함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해한다고 해서 덜 서운해지는 것도 아니다. 이해와 감정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고 엇갈린다.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우리 둘 다 조금씩 생각을 바꿔야 한다. 친구는 ‘가장 가까운 사람은 알아서 이해해 줄 거야’라는 믿음 대신, 최소한의 신호라도 건네는 연습이 필요하다. “오늘은 좀 지쳐서 말이 없을 것 같아”라고 미리 상대방에게 이야기 하면 서로가 덜 다친다. 그리고 나 역시 섭섭함이 쌓이기 전에 조심스럽게 표현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쌓아두었다가 버럭 감정을 터트릴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서로의 에너지가 바닥났을 때를 대비해, 미리 정해둔 거리와 방식이 있다면 우리는 같은 문제로 덜 부딪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친구를 이해하고 싶다. 나의 섭섭함도 부정하고 싶지 않다. 감정 노동에 짓눌려 가까운 사람에게 친절할 에너지가 없는 친구를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친구가 아닌것도 아니고 관계가 끝날 사이도 아니다. 그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한 내 마음 한쪽에 남아 있는 섭섭함이라는 감정을 문장으로 꺼내어 내 마음을 들여다 보고 다독여주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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