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임원의 부친상으로 조문을 다녀왔다. 생각보다 빈소가 한산했다. 빈소 입구의 근조화환 갯수도 많은 편은 아니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조문객이 많으면 자식이 사회생활을 잘했다는 증거처럼 받아들여지고, 조문객이 적으면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는 묘한 공식이 남아 있다. 대기업 임원이라는 직함이 무색하게 빈소가 한산하다는 이유로 조심스러운 수군거림이 흘러나왔다. 나 역시 그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지금은 장례문화도 많이 바뀌었다. 기업문화 역시 예전처럼 직원들이 단체로 몰려가 문상하는 시대는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도 조문객이 없는 빈소는 좀 쓸쓸해 보였다.이미 바뀐 현실에 살고 있으면서도, 내 낡은 편견과 선입견에 나 스스로도 놀랐다.
조문 가기 전부터 부의금을 얼마로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직장 내 상사와 부하직원이라는 관계에서 기업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선은 어디까지일까, 너무 적어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부담을 주지도 않는 금액은 얼마일까를 혼자 계산하고 있었다. 5만 원일까, 10만 원일까. 애도를 전하러 가는 자리에서조차 이런 계산을 하는 게 맞나 싶었다. 개인의 마음보다 관계의 규칙과 평가가 먼저 떠오르는 이 장면이, 지금의 장례문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겪은 가족의 장례였다. 나도 너무 어렸고 형제들도 모두 20대의 어린 나이였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장례라는 큰일을 맞닥뜨렸다. 그때의 장례는 지금과는 또 다른 풍경이었다. 시골이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온 마을이 함께 슬퍼했고, 함께 장례를 치렀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상여를 메고 온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상여의 무게보다 그때 함께 걸어주던 사람들의 발소리와 울음이 아직 기억에 남아 있다.
그 시절의 장례에는 부의금 액수를 두고 고민하는 분위기가 지금만큼 크지 않았다. 누가 얼마나 냈는가보다 누가 함께 와 주었는지가 더 중요했다. 마을 공동체 안에서 자연스럽게 슬픔을 나눴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장례문화는 유교적 공동체 문화 위에서 형성되었고, 죽음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집안과 문중, 마을 전체의 일이었다. 조문은 애도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관계의 확인이었다. 조문객의 숫자는 그 사람의 삶과 사회적 위치를 보여주는 지표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코로나를 거치며 장례문화는 빠르게 변했다. 회사에서 단체로 문상하던 문화는 거의 사라졌다. 온라인 조문이나 화환, 메시지로 마음을 대신하는 방식도 자연스러워졌다. 기업문화 역시 의무보다는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인식은 아직 그 변화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 듯하다. 빈소가 한산하면 여전히 숫자를 먼저 보고, 부의금의 액수로 마음의 크기를 가늠하려 한다.
지금의 장례문화는 과거와 미래 사이 어딘가 중간 지점인 듯하다. 앞으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는지, 얼마를 냈는지를 묻기보다 어떤 방식으로 마음을 전했고 어떻게 기억하고 애도했는지를 더 중요하게 묻는 쪽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한산했던 빈소를 보고 자식들의 사회적인 성공도를 측정하는 시선과, 부의금 봉투 액수를 고민했던 나의 마음은 내가 기억하는 옛날의 장례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장례문화의 변화를 동시에 보여주는 포인트이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장례문화는 애도를 ‘보여주는 일’에서 ‘존중하는 일’로 옮겨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이 오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 오지 못해도 이해받을 수 있고, 금액이 아니라 진심이 기준이 되는 방향이어야 한다. 회사에서는 조문 여부나 부의금이 암묵적인 평가 기준이 되지 않도록 선을 분명히 하고, 개인은 각자의 형편과 방식대로 애도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장례는 관계를 증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남은 사람들이 고인을 조용히 기억하고 슬픔을 정리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숫자와 액수로 판단받지 않는 장례, 한산해도 쓸쓸하지 않은 장례가 이제는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