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시간이 안되겠지?"

소심한 약속 정하기에서 드러나는 사회적 위치

by 수인살롱

전직 경찰관이었고 지금은 명예퇴직을 하신 분이다.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다. 예전에는 가끔 얼굴도 보고 식사도 하던 사이였는데, 어느 순간 연락이 뜸해졌고 관계의 끈도 자연스럽게 느슨해졌다. 사실 그분이 명예퇴직을 했다는 사실조차 얼마 전 우연히 지인의 부고소식을 알리는 과정에서 알았다. 조만간 시간을 내어 식사를 한번 하자는 말로 통화를 마쳤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식사 약속을 정하는 과정이 생각보다 매끄럽지 않았다. 그분도 뭔가 소일거리를 하고 계신 듯했고, 저녁 8시 이후에나 시간이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평일 저녁 8시 이후에 잠깐 보자고 했다. 그런데 주말에 연락이 와서 “평일 저녁은 너무 늦은 시간인 것 같고, 오늘은 시간이 안 되겠지?”라는 식의 말을 건넸다. 보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모호한 제안이었다. “네가 바쁠 것 같아서”라는 배려의 말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한 발 물러서는 느낌이 강했다. 전화는 벨이 한 번 울리고 끊겼고, 대신 ‘전화 시도’ 기록만 남았다. 나도 모른 척 넘겼지만, 그 소심한 태도가 꽤 불편하게 남았다.


내가 기억하는 그분은 기개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경찰이라는 직업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마약 수사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던 분이었다. 말투도, 태도도 늘 단단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조심스럽고, 지나치게 눈치를 보는 모습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당황스러웠다. 사람에게 사회적인 포지션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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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관계에서의 우위는 꼭 나이, 성격, 인격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많은 경우 ‘지금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 ‘사회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가 관계의 무게 중심을 결정한다. 현업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말에 힘이 실린다. 약속을 제안하는 쪽이 되고, 관계의 주도권을 자연스럽게 쥐게 된다. 반대로 업에서 손을 놓는 순간, 자신감도 함께 내려앉는다. 이전의 성취와 경험이 사라진 것은 아닌데, 그것을 현재형으로 설명할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은 먼저 당당하게 식사 약속 하나 정하지 못했다. 거절당할까 봐, 부담을 줄까 봐, 혹은 스스로가 이미 상대보다 한 단계 아래에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분보다 나이도 어리고, 후배의 입장인데, ‘현업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관계의 균형추가 기울어져 있었다. 그 사실이 안타깝기도 했고, 멀지 않은 미래의 내 모습 같아서 더 짠했다.


올바른 사회적 관계는 우위와 열위로 유지되지 않는다. 서로의 현재를 존중하되, 과거와 미래까지 함께 인정하는 관계여야 한다. 직업은 관계의 도구일 수는 있지만, 관계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퇴직 이후에는 더 의식적으로 자신의 삶을 설명할 언어를 가져야 한다. 직함 대신 역할을, 직업 대신 일상을, 성과 대신 태도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존감이 무너지지 않는다.


퇴직 이후에도 사회적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먼저 자신을 축소하지 않는 연습이 필요하다. 예전의 내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당당하게 소개하는 것. 약속 하나쯤은 먼저 정해도 괜찮고, 거절당해도 괜찮다는 마음을 갖는 것. 관계는 우위를 증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니까.


약속이 어정쩡하게 남은 채 끝난 그 통화는,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남겼다. 사람은 직업을 떠나도 사람이지만, 사회는 여전히 직업으로 사람을 구분한다. 그 간극 속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 나는 나중의 나에게 이 장면을 오래 기억해 두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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