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 권력 교체

주물냄비와 알록달록 그릇들

by 수인살롱


나는 요리를 에너지를 채우기 위한 행위쯤으로 생각한다. 배가 고프니 만들고, 만들었으니 먹는다. 빠르게 한 끼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얇은 스텐 냄비를 좋아한다. 물도 금방 끓고, 불을 끄면 바로 식는다. 속도전이다.


반면 딸은 요리에 진심이다. 한 가지 음식을 만들어도 시간을 들이고, 색감을 고민하고, 그릇까지 계산한다. 나는 깨끗하고 정갈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데, 아이는 예쁜 조리도구와 식기류가 요리의 일부라고 말한다. 어릴 때는 선택권이 없었지만 이제는 자기 취향을 또박또박 말한다. “엄마, 이건 좀 별로야.”


오늘은 둘이서 냄비와 그릇을 본격 쇼핑 했다. 결국 알록달록한 접시와 빨갛고 파란 주물냄비를 샀다. 나는 늘 하얀 접시를 고집해왔다. 하얀 그릇 위에 음식이 제 색을 낸다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아이는 노랑, 파랑, 보라색을 집어 들었다. 주방이 무지개처럼 변했다. 얇은 스텐 냄비를 쓰던 내 손에는 묵직한 무쇠 주물냄비가 들려 있었다.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할인이라지만 내 기준에서는 꽤 큰 결심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못마땅했다.


주물냄비는 사용법도 까다롭다. 처음 사용할 때는 세척 후 물기를 완전히 말리고, 약한 불에서 천천히 예열해야 한다. 갑자기 강한 불에 올리면 코팅이 상할 수 있다. 조리 후에는 세제를 많이 쓰지 않고 부드럽게 닦아 물기를 완전히 제거해야 녹이 슬지 않는다. 마른 뒤에는 얇게 기름을 발라 보관하면 좋다고 한다. 빠르고 간편함에 익숙한 나에게는 꽤 번거로운 절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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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주물냄비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두꺼운 무쇠가 열을 천천히 올리고 오래 품는다. 열 보존력이 뛰어나 음식이 고르게 익고, 한 번 끓으면 불을 줄여도 은근하게 맛이 우러난다. 찌개는 더 깊어지고, 밥은 더 차지게 된다. 묵직한 무게만큼 안정감이 있다. 대신 단점도 분명하다. 무겁고, 예열 시간이 필요하고, 관리가 번거롭다. 빠른 요리에는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오늘 저녁, 아이는 새로 산 빨간 주물냄비에 마녀스프라고 불리는 스튜를 끓였다. 뚜껑을 열자 김이 천천히 올라왔다. 아이의 얼굴은 그 김만큼이나 환했다. “엄마, 이거 봐. 너무 예쁘지?”


나는 여전히 하얀 접시가 편하고, 얇은 냄비가 손에 익다. 그런데 알록달록한 주방이 싫지 않았다. 딸이 만족스러워하니 나도 덩달아 마음이 풀렸다. 서로의 취향은 다르지만, 같은 부엌을 쓰는 동료가 된 느낌이다. 예전에는 내가 차려놓은 환경에 아이가 맞췄다면, 이제는 내가 아이의 취향을 배워가는 중이다.


주물냄비는 기다림이다. 천천히 달궈지고, 천천히 익어가고, 천천히 맛이 깊어진다. 부모자식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 내 방식만 고집했다면 몰랐을 풍경을, 아이 덕분에 본다. 조금 번거롭고, 조금 비싸고, 조금 낯설지만. 그 대신 우리는 함께 쓰는 주방에서 서로의 다른 취향을 존중하며 한 뼘 더 자랐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빨간 주물냄비가 썩 마음에 든다. 정확히 말하면 그 냄비를 고르며 반짝이던 딸의 눈빛이 마음에 든다. 주물냄비처럼 오랫동안 그 설레임이 유지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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