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나이로 사는게 아니라 역할로 산다

by 수인살롱

오늘 친정에 다녀왔다. 김치통을 들고 집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반백 살을 향해 가는 중년 여자가 아니라 갑자기 스무살 철부지로 강등된다. 팔순이 넘은 엄마는 김치통을 건네주며 “무거우니까 조심해서 들어. 차 트렁크에 조심해서 넣어야 국물 안흐른다” 나는 이미 운전해서 한 시간은 족히 달려왔고, 회사 일도 척척 해내는 사람인데, 엄마 눈에는 아직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철없는 딸이다. 부엌에서는 “칼 조심해라”, “그건 네가 하면 더 어질러”라는 말이 자동재생된다. 팔순 노모 앞에서 괜히 “엄마, 나도 다 할 줄 안다고”라고 말해봤자 서로 잔소리 밖에 안된다. 엄마의 세계에서 나는 늘 ‘어리고 철없는 딸’이라는 역할로 고정되어 있다.

김치통을 트렁크에 싣고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조금 전까지는 어리고 철없는 딸이었는데, 현관문을 여는 순간 나는 다시 집구석 호랑이 엄마로 변신 한다. “방 청소 왜 안 했어?” “왜 이렇게 느려?” “미리미리 좀 해!” 목소리 톤이 한 옥타브 올라간다. 나도 모르게 엄마가 했던 말투와 비슷한 억양이 튀어나온다. 방금 전까지 “칼 조심해라” 소리를 듣던 내가, 이제는 “휴대폰 그만 보고 일어나라”를 외치는 사람이 된다. 나이는 그대로인데 역할이 바뀌니 말투도, 표정도, 걸음걸이도 달라진다.

재미있는 건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밖에 나가면 야무지고 똘똘하게 사회생활을 잘한다. 어른들께 인사도 또박또박, 친구들 사이에서는 리더 역할도 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집에만 오면 갑자기 리모컨도 못 찾는 아이가 된다. “엄마, 내 양말 어디 있어?” “엄마, 이거 어떻게 해?” 세상에서 제일 복잡한 문제를 푸는 사람처럼 찡그리다가도, 밖에 나가면 멀쩡히 제 일을 해낸다. 나는 그런 아이들에게 “왜 이렇게 빈틈이 많아”라고 말하지만, 사실 아이들도 자기 자리에서는 충분히 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내 앞에서는 ‘아직은 아이’라는 역할을 맡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나이로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쉰을 향해 가지만 엄마 앞에서는 여전히 어린 철부지딸이다. 우리 아이들은 성인이 되었지만 내 앞에서는 아직 어설픈 아이다. 엄마는 팔순이 넘어도 여전히 ‘엄마’ 자리를 굳건히 지킨다. 허리가 아프다면서도 김치통을 싸주고, “많이 먹어라”를 반복한다. 나이가 들어가도 역할은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내려놓을 수 없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를 나이로 인식하지 않고, 역할로 기억한다. 엄마에게 나는 여전히 손잡고 시장 다니던 아이다. 내게 딸은 유치원에서 손 흔들던 작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나이와 상관없이 그 역할을 기억하며 행동한다. 보호하고 싶고, 다그치고 싶고,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먼저 튀어나온다.

냉장고에 김치통을 넣으며 피식 웃음이 났다. 조금 전까지 나는 “조심해라”를 듣던 사람이었고, 지금은 “정리 좀 해라”를 외치는 사람이다. 하루에 몇번이나 역할이 바뀐다. 딸이었다가, 엄마였다가, 또 누군가의 이웃이고 친구가 된다. 숫자는 하나인데 자리는 여러 개다.

사람은 나이로 사는 게 아니라 역할로 사는 것 같다. 엄마 앞에서는 딸로, 딸 앞에서는 엄마로. 그 자리에 서는 순간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역할에 맞는 표정을 짓고, 말투를 하고, 책임을 떠안는다. 나이는 세월이 더해준 숫자일 뿐이다. 오늘의 나는 내가 서 있는 자리로 설명된다.

언젠가 우리 딸도 누군가의 엄마가 되면, 오늘 내 말투를 흉내 내며 “미리미리 좀 해”라고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또 다른 자리에서 여전히 엄마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역할은 그렇게 세대를 건너 이어지고,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자리를 바꿔가며 살아간다.

결국 중요한 건 몇 살이냐가 아니라, 오늘 내 자리를 어떻게 감당하느냐다. 딸로서는 사랑을 받고, 엄마로서는 사랑을 건네고, 작가로서는 오늘 한 줄을 써 내려가는 것. 나에게 맡겨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순간, 삶은 더 풍요로워진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누군가의 딸이자 엄마이자,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을 충분히 값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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