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로 향하는 내리막길에서 자전거 핸들을 놓쳤다. 내가 놓은건 아니니까 놓쳤다고 하는게 맞겠다. 잠깐 모자를 고쳐쓰느라 오른손을 떼는 순간, 갑자기 방지턱에 덜컹 걸리면서 핸들이 갓 잡힌 미꾸라지처럼 몸부림치면서 왼손을 빠져나갔다. 보통 내리막에서 전기자전거 속도가 20마일 정도니까 시속 30킬로는 됐을 것이다. 나는 아주 급하게 왼손 뿐 아니라 오른손까지 핸들이 있던 자리로 복귀시키며 다시 핸들을 부여잡으려고 했다. 정말로 손은 눈보다 빠른가보다. 그 순간 핸들의 모습은 기억나지 않지만 두 손에 느껴지던 감각은 생생하다. 왼손과 오른손이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복귀했을 때 미꾸라지 같은 핸들은 격하게 시계방향으로 꺽이면서 왼손의 손가락 끄트머리를 넘어설랑 말랑 할 찰나였다. 아니, 찰나라고 하기엔 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거리는 남아있었다. 왼손 중지를 기준으로 첫번째 마디와 두번째 마디 사이 쯤에서 핸들을 다시 느꼈기 때문이다. 핸들이 정말 손가락 끝을 벗어났다면 내 손은 핸들에게 스치며 안녕, 했을 것이다. 가까이 나간다고 헬맷도 쓰지 않았었으니 어쩌면 꽤 많이 다쳤을지도 모른다. 손가락 한마디 차이로 나는 가슴을 쓰러내렸다.
물론 그 모든 순간이 전체적으로 보면 찰나이긴 했다. 이 모든 일들이 사실은 본능적으로 일어난 일이고, 정신을 차렸을때 핸들을 다시 손바닥 아래로 온전히 자리잡은 뒤였다. 다시한번 본능적으로, 이번에는 순식간에 지나간 일들에 대한 놀라움으로 괴성을 내면서 놀란 마음을 달랬다. 마트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핸들이 내 목숨줄인양 꼭 붙잡고 자전거를 달렸다. 그리고 재밌게도 오늘 글쓸거리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도 글감이 없어서 고민하는 일은 잘 없지만 오늘처럼 특별한 사건이 있어서 쓰는 글은 아니다. 하루는 대체로 소소하게 돌아가고, 따라서 매일 쓰는 글도 소소한 얘기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오늘처럼 극히 짧은 순간동안, 그것도 우연히 경험한 일이 그날 하루 전체를 대변하는 글감이 된다는게 과연 적절한지에 대한 의심이 들기도 한다. 쓸데없는 의심이 많다. 사건은 짧았지만 기억은 길었으니 부적절하다고는 할 수 없겠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의식도 못할만큼 짧은 시간에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다양한 형태의 희비가 갈린다. 수영이나 육상 등 스포츠의 세계에서 특히 그렇다. 육상에서는 고작 한두걸음 차이로 승부가 나기도 하고, 또 겉으로 보기에는 꽤 거리차가 있어보이는 승부라도 막상 경기 기록을 보면 1등과 2등이 고작 1-2초 차이밖에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쇼트트랙에서 '스케이트 날 하나 차이'의 승부는 우리에겐 익숙한 장면이 됐다. 모두 의식도 못할만큼 짧은 순간에 결정되지만 앞으로의 향방을 크게 좌우하는 일들이다.
한가지 차이가 있다면, 그런 순간들은 우연에 의해서 좌우되는건 아니라는 점이다. 오늘 내가 겪은 자전거 위에서의 순간은 우연이 사고처럼 일어난 일이었지만, 스포츠 경기에서는 간발의 차라도 늘 일관성 있게 앞서는 선수들이 있다. 그럼에도 간발의 차이가 우연이라면, 이런 선수들은 우연을 컨트롤 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능력 말이다. 우연은 우연이고 필연은 필연인데, 어떻게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 수 있을까?
선수들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그들은 컨트롤 할 수 있는 보통의 시간을 컨트롤 함으로써 컨트롤 하기 어려운 결정적 순간까지 컨트롤 해낸다. 일상적으로 돌아가는 하루 하루 속에서 식단을 조절하고, 근육량을 적절하게 조절하고, 수면 시간을 규칙적으로 관리하고, 잘 설계된 운동 프로그램을 수행한다. 그게 잘 되면 경기가 진행되는 시간, 그 중에도 승부를 가르는 결정적인 '순간' 역시 조절하고 관리해서 원하는 바를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 중요한 순간은 높은 파도처럼 예고 없이 찾아오고, 찾아왔을 때에는 생각같은걸 할 시간적 여유는 없을 때가 많다.
어제 오랜만에 칠레에서 온 친구인 브루노와 맥주를 마시면서 파도를 기다리는 서퍼에 대해서 얘기했다. 좋은 파도가 언제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서핑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멋진 자세로 멋진 파도를 타는 모습이지만 실제로는 기다리는 시간이 파도를 타는 시간보다 훨씬 길다고 한다. 서핑을 하기 위해서 서퍼는 기다리고, 준비하는 수 밖에 없다. 미리 기다리고 미리 준비하라는 전형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때로는 해변에 나와서 여유롭게 햇볕을 즐기는 것도 중요하다고 브루노의 아버지는 얘기했다고 한다. 기다림과 여유 사이의 균형. 역시 균형이 중요한가보다. 자전거 위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